실시간으로 중계되는 가운데 드디어 두 남북 정상이 평양에서 만났습니다. 우리 남쪽 대통령은  평양시민의 열렬한 환영을 받았습니다. 눈물겹게 감격스러우면서도 평양 여성들이 획일적으로 입고 나온 한복의 강제성이 마음을 우울하게 합니다. 어느 전문직 여성이 이런 말을 했습니다. ‘지구촌 의식이야 말로 내가 가장 싫어하는 것이다. 그것이 내 삶을 망쳐놓고 있다. 세상 모든 불행과 폭력과 불의의 장면들이 TV를 통해 우리 집 안방으로 쏟아져 들어오는 것을 나는 참을 수 없다.’

    우리는 모두 그런 기분이 들 때가 있습니다. 우리는 세계 문제의 어마어마한 규모에 질겁하며, 어떻게 대처할지 몰라 무력감을 느낍니다. 그래서 TV를 치워버리기도 합니다. 그러나 손에 든 스마트폰이 모든 지구촌 구석구석에 환하게 열려 있습니다.   세상은 어떤 곳인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구원의 소식과 빛의 문화를 누리지 못하는 이들이 30억에 달합니다. 그들은 그리스도를 알지도 못한 채 죽어갑니다.

     세상은 어떤 곳인가? 너무 잘 먹어서 살을 빼려는 부자들과(먹기 위한 비용보다 빼려는 비용이 더 많이 드는) 굶주려 바짝 마른 가난뱅이로 나뉘어 있습니다. 그 격차는 놀라운 속도로 벌어지고 있습니다. 소수의 부국(富國)들이 인류 역사상 물질적 풍요의 최정상을 구가하고 있는 사이 100개국 이상의 나라에서는 세계 인구의 3분의 2가 만성 식량난에 허덕이며 굶어 죽고 있습니다. 세상은 어떤 곳인가? 지구는 인구과잉과 과잉소비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인구의 순증가는 하루 20만명, 한해 7천3백만에 달해서 현재 세계 인구는 75억입니다.

     아무도 지구의 정확한 수용 능력은 모르지만 아무래도 한도에 육박한 것 같습니다. 인구과잉이 제3세계의 문제라면 과잉소비는 선진국들의 문제입니다. 지금 미국에서 출생한 아이 1명이 평균 소비하는 자원은 제3세계에서 출생하는 아이의 20명분에 해당한다고 합니다. 고의적 낭비와 계획적 소비는 선진국 경제의 중요한 측면입니다. 지금 선진국은 지나치게 먹고 지나치게 사고 지나치게 소비하면서 지나치게 많은 유독 폐기물을 지상과 공중에 쏟아내고 있습니다. 지상에 쌓인 쓰레기와 공중에 가득찬 이산화탄소 때문에 지구 온도는 계속 상승하여 올 여름에도 온 세계가 폭염으로 고통 당했습니다.

     오존층의 파괴 때문에 북극의 절대빙하(역사 이래 절대 녹지 않았고 녹아서도 안되는)가 벌써 25%나 녹았다고 합니다. 이 속도로 녹는다면 2030년이면 다 녹는다고 합니다. 그러면 모든 바람의 Circulation에(더운 바람과 찬바람의 순환) 이상이 생기고 지구는 폭염과 혹한으로 인해 사람뿐 아니라 농작물이 심각한 피해를 입는다고 합니다. 12년밖에 남지 않았습니다. 지금 당장 모든 생산과 소비를 멈춘다 해도 공중에 차있는 이산화탄소를 빼내지 않는 한 이 지구온도 상승은 멈출 수 없다고 합니다. 그 방법이 없기에 이미 손쓸 수 없는 단계에 이르렀다고 환경학자들은 절망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암울한 그림이 끝이 아닙니다. 지구의 마지막(종말론)은 희망입니다. 새 하늘 새 땅(새 에덴동산)이 도래합니다. ‘창조적 파괴’입니다. 우리가 결정론의 감옥에 갇혀 있지 않으면 됩니다. 능력으로 만유를 주관하시는 주님은 자기 백성을 변화의 주체로 사용하기 원하십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생명의 메시지가 수많은 영혼에 닿을 수 있습니다. 우리는 기독교적 단순함의 능력으로 악을 이기며 천로역정의 길을 오늘도 뚜벅뚜벅 걸어가면 됩니다.

    성경 레위기에 나오는 ‘너희는 거룩하라’(Be holy)는 문장은 명령형입니다. 이는 모든 인간이 자신의 인격에 대하여 스스로 책임을 져야 한다는 뜻입니다. 사랑의 하나님은 우리에게 선택할 권리(자유의지)를 주셨습니다. 그렇기에 우리가 해야 할 일을 하나님이 대신 해 주지 않습니다. 우리가 한 일에 대한 책임도 우리가 져야 합니다. 우리 얼굴에 대한 책임도 우리가 져야 합니다. ‘거룩’이란 정 중앙에 흔들림 없이 서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 삶에는 울음도 없고, 웃음도 없으며, 찬양도 탄식도 의심도 없고, 희망도 밝은 유머도 전심을 다하는 기도도 없습니다. 다양한 기운이 활발하게 일어나는 대신, 삶이 뜨뜻미지근해질 것이며, 결국 영혼의 생기가 사라져 버릴 것입니다.

    “네가 이같이 미지근하여 뜨겁지도 아니하고 차지도 아니하니 내 입에서 너를 토하여 버리리라”(계3:16)‘거룩’이란, 삶입니다.‘신앙’이란, 삶입니다. 모양이 아니라 삶의 능력입니다. 회복된 사람으로 사람 맛을 내며 사는 것입니다. 삶의 조화로운 대립은 자기에게 없는 특성을 존중하는 것입니다. 성격이 안 맞는다고 갈라 서는 게 아니라, 나와 다름을 존중하고 그것 때문에 더 사랑하는 것입니다. 나와 똑같으면 무슨 조화와 재미가 있을까요? 나와 다름이 나를 채워주는 것이고 거기에서 나오는 질서가 바로 사랑입니다.

     온 마음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고 상반된 힘을 존중하는 것입니다. 오직 열정 또는 축복만을 고집하는 태도는 하나님을 반쪽 마음으로 사랑하는 것입니다. 진정한 사랑은 고난도 시험도 아픔도 기뻐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것 때문에 내가 더 하나님의 사람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이 창조하신 만물의 황금비율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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