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년 돌아오는 5월이지만 금년 5월은 느낌이 사뭇 다릅니다. 우리가 사는 이 미국과 우리 조국(남북)이 한 고리로 묶여버린 느낌과 함께 4.27남북정상회담의 <판문점 선언> 후속조치들이 조속히 실행되어야 하고 한미정상회담도 열어야 하고 북미정상회담도 준비해야 합니다. 그에 발맞추어 한중, 한러, 북중, 남북미 회담까지 치열한 외교전이 5월에 펼쳐집니다. 이어서 우리 세대 내내 극한 대치로 지겹도록 이어진 (나의 육군병장 3년은 누가 보상해주나요?) 남북 휴전협정이 정전협정으로, 나아가 평화협정으로, 그리고 통일까지, 이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 우리는 흔들리지 않고 방향 잃지 않고 운전대를 꽉 잡아야 합니다. 결국 우리 민족을 위한 가장 좋은 방향은 우리가 가장 잘 알고 있기에 우리가 열어야 합니다. 기회는 아침처럼 저절로 오는 게 아니라 열어야 하는 것이지요. 

    “자 우리 갑시다, 당신과 나/ 수술대 위에 누운 마취된 환자처럼/ 저녁이 하늘을 배경으로 사지를 뻗고 있는 지금/ 우리 갑시다, 반쯤 인적이 끊긴 어느 거리를 통해/ 싸구려 일박 여인숙에서의 불안한 밤이/ 중얼거리며 숨어드는 곳/ 굴 껍질 흩어져 있는 톱밥 깔린 레스토랑을 지나/ 위압적인 질문으로 당신을 인도할/ 음흉한 의도의/ 지루한 논쟁처럼 이어진 거리들을 지나/오, 묻지는 마세요, ‘무엇이냐?’라고/ 일단 가서 방문해 봅시다” T.S.엘리엇의 <프루푸록의 연가> 서두입니다. 불안한 밤, 위압적인 질문, 음흉한 의도, 지루한 논쟁, 무엇이 있든 한번 가 봅시다! 묻지 말고 일단 부딪쳐 보자!는 것이지요. 만나보니까 다르거든요. 

    트럼프 대통령이 북미정상회담을 5월에 당기고 그것도 판문점을 고려하고 있다고 합니다. 북미회담자체도 세계사적인 일이지만 판문점에서 열린다면 더욱 극적인 모습이 되겠지요. 문재인 대통령과 김정은 국무위원장과의 40분 도보다리 벤취 단독회담의 모습은 눈물이 날 정도로 감동적이였습니다. 봄 녘 산새들의 지저귐마저 어우러져 한 폭의 동화를 보는 듯 했습니다. 새소리에 묻혀 감청도 불가능한 상태에서 ‘그래 두 정상이 저렇게 마주앉아 이야기하다 보면 안 될 일이 뭐 있겠나?’ 소망이 차오릅니다. 우리나라가 하나만 되면 얼마나 좋은 나라가 되겠습니까? 당장 경제성장이 7%로 뛰어 오른다고 합니다. 그리고 우리도 죽기 전에 고속전철 타고 옥류관 가서 평양냉면 먹어 보고, 베이징도 보고, 닥터 지바고가 타고 눈 속을 헤치며 달리던 시베리아 횡단 철도로 연결하여 생트 베째르 부르크(St, petersberg)의 푸시킨 마을도 거닐어 보고, 열차로 파리까지 갈 수 있다고 하니, 가슴이 벅찹니다. 

    그런데 자한당 대표께서는 도대체 어디서 살다 오셨는지? “혹서와 혹한을 완충하는 봄이 없고 가을이 없는 고원지방”에서 살다 오셨는지? 따뜻한 봄과 서늘한 가을도 있는 아름다운 금수강산에 살면서, 왜 이리 심성이 “극단적”이실까? ‘위장된 평화적 정치 쇼’라니? ‘주사파들의 숨은 합의’라니? 아무리 평양냉면을 못 잡수셨더라도 굳이 그렇게 핵! 핵! 하면서 원시적 분노를 표출하실 필요가 있을까? 진정한 보수라면 이데올로기보다 민족의 이익을 먼저 생각해야 하시지 않을까? 코앞에 닥친 북미정상회담 때는 뭐라고 하려고 저러시나? 지방선거는 어떻게 치루시려고? 대한민국 국적의 생태적 보수 한 사람으로서 한편 걱정도 됩니다.

    우리는 사실 ‘국가’를 의식하지 못합니다. 국가가 직접, 간접적으로 행하는 감시와 통제는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보수주의자들에게 국가는 곧 그 안에서만 국민이 진정한 의미의 인간이 될 수 있는 존재론적 존재입니다. 진보주의자들에게 국가는 시장경제에서 비롯되는 빈부 격차를 해소하고 평등의 이념을 실현하기 위한 정치적 개입의 도구입니다. 보수든 진보든 국가의 중요성을 인정한다는 점에서는 일치하나, 보수가 국가를 인간의 ‘목적’으로 보는 반면, 진보는 국가를 다분히 ‘수단’으로 봅니다. 대한민국은 민주주의 국가입니다. 민주주의란, 이견의 존재를 인정하는 관용의 정신일 뿐 아니라 동시에 그 이견에도 불구하고 함께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지 찾아내는 <실천적 능력>입니다. 

    같은 일을 두고 다른 시각으로 볼 수 있습니다. 다를 뿐 틀린 것은 아닙니다. 때에 따라, 어떤 때는 이쪽에 비중을 두어야 하고, 다른 어떤 때는 저쪽에 더 비중을 두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인간이 감당해야 하는 일도 이와 같습니다. 은혜가 없다면 우리 삶은 얼마나 고달플까요? 반대로 은혜에만 매달리는 삶은 얼마나 고루할까요? 그래서 우리 삶에 필요한 긴장은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신의 은혜를 깨닫는 동시에 자기를 극복하고 주어진 일을 잘 감당할 때 매력있는 사람이 됩니다. 은혜는 결코 우리 일을 대신해 줄 수 없습니다. 우리는 은혜를 믿으면서 열심히 공부해야 하고, 은혜를 믿으면서 성실히 일해야 합니다. 일은 삶의 ‘내용’이며, 은혜는 삶의 ‘힘’입니다. 은혜와 일이 균형을 이룰 때 우리 삶이 아름다워집니다. 지금 한반도에 부어지는 하나님의 은혜가 기가 막힙니다. 이 절호의 기회에 우리 대한민국이 참 민주주의 국가로서 민족 이익을 위해 기여하는 길을 함께 돌파하는 결정적 5월이 되었으면 참 좋겠습니다. “하나님이 보호하사 우리나라 만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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