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5월 안에 북한 김정은과 만나겠다는 의사를 밝혔다. 사상 처음 미·북 정상회담이 열리게 되는 것이다. 남북이4월 말 판문점에서 정상회담을 열기로 합의한 데 이어 역사적인 첫 미·북 정상회담도 가시권에 들어온 셈이다. 이로써 김정은이 정말 핵을 포기할 생각이 있는 것인지, 아니면 이 모든 것이 또 한편의 거대한 쇼일지는 앞으로 한두 달 안에 드러나게 될 것이다. 잘되면 25년을 끌어온 북핵 사태가 끝날 수 있다. 낙관은 금물이지만 비관할 필요도 없다. 북·미 정상회담의 낭보는 전쟁의 먹구름으로 가득 찼던 한반도에 대반전이 아닐 수 없다. 지난해 북한이 6차 핵실험과 미 본토에 닿을 수 있는 대륙간탄도미사일(ICBM)을 시험발사하면서 미국과 북한 사이에 무력 충돌의 분위기가 조성됐다. 당시 트럼프 대통령은 ‘화염과 분노’를 경고하며 군사옵션을 배제하지 않겠다고 했다. 실제 워싱턴에선 대북 선제타격론도 불거졌고, 이에 맞서 북한도 미국령 괌 주변에 대한 포위사격 방안을 검토 중이라고 으름장을 놓았다. 양측의 ‘말 전쟁’은 올 1월 김 위원장 신년사에서 “핵 단추가 책상 위에 놓여 있다”로 증폭됐는데, 트럼프 대통령도 “나는 더 크고 강력한 핵 버튼이 있다”고 받아치면서 위기는 점점 고조됐다.

    이처럼 암울한 상황에서 역전극을 이뤄낸 문재인 정부의 ‘중매 외교’는 고무적이다. 문 대통령의 ‘운전자론’이 통했다고 볼 수 있다. 평창 동계올림픽을 계기로 시도한 남북 고위급 접촉이 촉매제가 됐다. 김 위원장의 친동생인 김여정의 방남, 대북 특사단의 방북과 김 위원장과의 만찬 회동으로 이어지면서 북한의 의사를 타진하고 미국에 전달하기에 이르렀다. 지난주 대북특사단 활동결과를 미국측과 공유하기 위해 워싱턴으로 떠났던 정의용 실장이 백악관에서 한국과 미국을 대표해 북·미 정상회담을 발표한 것은 문 대통령이 ‘한반도호(號)’의 운전대를 잡았음을 방증한다. 하지만 지금까지 북핵 협상의 역사는 한미의 '실수 반복사'였다. 1994년 미국은 북핵 시설 폐쇄도 아닌 동결을 조건으로 중유를 매년 50만톤을 주기로 했고 대북 무역·금융 제재도 줄줄이 풀었다. 북은 중유를 총 400만톤이나 챙기면서 뒤로는 고농축우라늄 핵 프로그램을 개발했다. 북은 속이고 우리는 속는 역사의 시작이었다. 북은 과거에도 핵 폐기에 합의해놓고 검증을 거부한 전력이 있다. 또, 최근의 급격한 정세 변화는 과거에도 이뤄진 남북미 3자간 역사의 압축적 전개이기도 하다. 2000년 남북 정상회담 이후 조명록 북한군 차수와 매들린 올브라이트 미 국무장관이 상호 방문했다. 당시 빌 클린턴 대통령도 평양 방문을 계획했지만 공화당으로 정권이 바뀌면서 방북을 접었다. 2007년 남북 정상회담 이후엔 남북미 3국 정상이 모여 종전(終戰)을 선언하는 방안도 추진된 바 있다. 이런 과거는 모두 미완 또는 실패의 경험이었으며, 지금의 기대도 금세 실망으로 바뀔 수 있음을 보여준다.

    결국 김정은이 핵 포기 대가로 내걸 조건이 무엇이냐가 관건이다. 만약 한·미 모두, 혹은 어느 한쪽이 도저히 수용할 수 없는 조건을 내건다면 핵 포기를 하지 않겠다는 것과 같다. 대화한다면서 시간을 끌고 핵 무력을 완성해 한·미가 더 이상 손쓸 수 없게 만들려는 것이다. 그런 조건으로 가장 많이 거론되는 것이 '한미 동맹을 종료하고 주한 미군을 철수하면 핵을 포기하겠다'는 내용이다. 핵은 김정은에겐 생명과도 같은 존재이다. 핵을 포기하는 순간 북한 내에서 종말을 맞을 수 있다는 분석도 적지 않다. 그런 김정은으로서는 '한미 동맹과 북핵을 맞바꾸자'고 공을 한·미로 넘길 가능성이 실제 없지 않다. 북이 핵 폐기 조건으로 늘 주장하는 '평화협정'도 바로 한미 동맹 종료를 말하는 것이다. 그러나 한미 동맹과 주한 미군은 북한을 공격하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북 위협을 방어하고 전쟁을 막기 위해 있는 것이다. 한미 동맹은 실제 그런 역할을 해왔고 지금의 대한민국은 그 바탕 위에 서 있다. 북핵이 실제 없어진다해도 한미동맹이 사라지면 한반도의 전쟁 위험은 오히려 더 커질 우려가 있다. 우리로서는 한미동맹과 북핵 폐기의 맞교환을 받아들일 수 없다. 트럼프 대통령이 어떻게 반응할지 확언할 수는 없지만 한미 동맹 폐기를 받아들일 가능성은 거의 없다. 일각에서는 미국이 자신들의 우선 관심사인 북 대륙간탄도탄만 포기하고 북핵은 사실상 용인하는 거래의 가능성도 제기하고 있다. 이 경우 대한민국은 비상한 결단을 내릴 수밖에 없을 것이다. 가장 바람직한 것은 북한과 미국·일본의 수교로 북이 국제사회의 정상적 일원으로 나서고 북한 체제 안전은 유엔과 한·미·북·중·러 등 동북아 관련국이 모두 참여하는 안전보장 체제로 푸는 것이다. 북이 핵만 버리면 이 세계에 북을 공격할 나라는 하나도 없다. 이 경우 대북 제재 해제와 국제사회의 경제 지원으로 북한의 경제적 어려움은 단기간에 크게 개선될 수 있다. 김정은이 핵을 버리고 미·북 수교와 제재 해제를 얻는 것이 살길이라는 전략적 판단을 내리길 바랄 뿐이다.

    이번 트럼프 대통령의 미·북 정상회담, 문재인 대통령의 남북정상회담 발표가 과거 한국 햇볕 정권들의 대북 합의와 크게 다른 점은 바로 '또 속지 않는다' '핵 폐기가 실천될 때까지 제재를 풀지 않는다'는 의지를 분명히 하고 있다는 것에 있다. 김정은이 비핵화 의지를 밝히기까지 그 밑바탕에는 ‘최대의 압박과 관여’라는 미국의 대북 정책이 있었다. 트럼프 행정부는 군사적 정밀타격까지 검토하며 압박 강도를 최대한 높이면서도 대화의 문을 열어두고 김정은의 결단을 재촉했다. 정상회담 제안은 연말 중간선거를 앞두고 외교적 성과가 필요한 트럼프 대통령에겐 맞춤형 선물이기도 하다. 트럼프 대통령도 “커다란 진전이 진행되고 있으나 제재는 합의가 이뤄질 때까지 유지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완전한 비핵화까지 밀어붙이기 위해 우리 정부도 긴밀한 한미 공조 아래 압박을 계속하겠다는 방침을 거듭 확인했다. 북-미 정상회담이 사실상 합의되면서 지구상 마지막 유산으로 남아있던 한반도의 70년 냉전체제도 무너질 것이다. 그리고 남북, 북-미 정상회담이 북-중, 북-일,북-러 연쇄 정상회담으로 이어지면 동북아시아 국제질서도 전면 개편될 것으로 기대된다. 그 과정에서 북한과 미국은 끊임없이 서로의 진정성을 테스트하고 손익을 계산하며 중재자인 우리 정부를 애태울 수 있다. 문 대통령은 “기적처럼 찾아온 기회를 소중하게 다뤄 나가겠다.성실하고 신중히, 그러나 더디지 않게 진척시키겠다”고 했다. 우선은 4월 말 남북 정상회담까지 북한이 비핵화를 위한 보다 진전된 조치를 내놓도록 설득하고, 이를 토대로 5월 북-미 정상회담에서 구체화된 합의를 만들 수 있도록 해야 한다. 김정은 위원장으로부터 북한의 비핵화와 관련한 의지를 재확인하면서 이를 남북한 합의사항으로 공식화한 뒤 북미정상회담에서 트럼프 대통령과 김 위원장이 진전된 결과물을 만들어 낼 수 있도록 여건을 조성할 것이라는 관측에서다. 아직 북이 무너지는 상황은 아니기 때문에 김정은의 비핵화 언급의 진정성은 불확실하다. 어쩌면 김정은 자신도 확신이 없을 것이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미국의 전례 없는 대북 군사 조치 검토가 김정은과 북 정권 집단을 공포로 몰아넣었으며, 김정은을 비핵화 테이블로 끌어냈다는 현실이다. 때문에 김정은이 비핵화를 실천할 때까지 지금의 대북 경제 제재와 군사 압박은 흔들림 없이 밀고 나가야 한다. 그래야만 북핵 사태는 평화적으로 해결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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