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이고 싶어라/ 그냥 지나가 버리는 바람/ 이름을 정하지도 않고/ 슬픈 뒷모습도 없이/ 휙 하니 지나가 버리는 바람/ 아무나 만나면 그냥 손잡아 반갑고/ 잠시 같은 길을 가다가도 갈림길에서 눈짓으로 헤어질 수 있는/ 바람처럼 살고 싶어라/ 목숨을 거두는 어느 날/ 내 가진 어떤 것도 나의 것이 아니고/ 육체마저 벗어주고 떠날 때/ 허허로운 내 슬픈 의식의 끝에서/ 두 손 다 펴 보이며 지나갈 수 있는/ 바람으로 살고 싶어라/ 너와 나의 삶이 향한 곳/ 눈에 보이지는 않아도/ 슬픈 추억들 가슴에서 지우며/ 누구에게도 흔적 남기지 않는/ 그냥 지나는 바람이어라, 바람이어라..” 봄이 오는 길목에서 자꾸만 읽히는 <서정윤>의 시(詩)입니다. 여간 성가신 봄바람이 부는 날, 숲속을 걷다보니 벌써 나뭇가지의 끝자락이 파랗게 올라옵니다. 새소리의 여운이 다릅니다. 봄은 어김없이 우리에게 계절의 기쁨과 그 은밀한 속 뜰을 한 자락씩 열어 보입니다. 문명은 멈추지 않고 자연을 허물고 더럽히지만, 그럼에도 이 숲을 버리지 않고 철 따라 찾아오는 새들을 생각하면 눈물겹도록 고맙습니다. 시커멓게 죽은 나뭇가지에서 피어오르는 잎망울을 보며 ‘아 부활절이 가깝구나’ 비로소 부활의 아침을 생각합니다. 아내와 뒷마당을 정리합니다. 나는 그저 건성이지만 아내는 벌써 요조조모 밭을 가꾸고 이렁저렁 모종을 심었습니다. 풍성한 수확을 기대하면서 찬송까지 부릅니다. ‘사철에 봄바람 불어있고 하나님 아버지 모셨으니...우리 집 즐거운 동산이라....’ 이상하게 아내가 노래하면 집안이 더 행복해집니다. 그래서 안 해(안에서 비추는 햇빛) 일까요? ‘너무 욕심내지 말어 이 사람아, 천년만년 살거 아니야’ 어줍잖게 질러보지만 심고 가꾸는 일이 새삼 고맙고 감사합니다. 파란 하늘을 쳐다봅니다.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가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려졌나니...’(롬1:20) 하나님이 보입니다.

    사실 채소 농사는 먹는 것보다 기르는 재미에 있습니다. 그리고 나눠주는 재미에 있습니다. 그리고 도라지의 보라 꽃 위에, 정구지의 하얀 꽃 위에 날아드는 나비와 벌들의 유락을 보는 뿌듯함이 여간 쏠쏠한게 아닙니다. 그런데 몇 해 전부터 꽃은 피어도 열매를 맺지 못하는 기현상을 보면서 생태계의 위기를 실감하고 있습니다. 벌이 사라지고 있습니다. <아인슈타인>이 일찍 ‘벌이 사라지면 100년 안에 지구의 멸망이 온다’고 했는데 현재 지구상에서 벌이 40%나 사라져 양봉업자들이 울상이라고 합니다. 그 원인이 스마트 폰의 전자파 때문이라네요. 아마죤의 인디오도, 북극의 에스키모도 스마튼 폰을 쓰고 있으니 집을 나가 꿀을 채취한 벌들이 전자파 때문에 헷갈려서 집(벌집)을 찾아오지 못하고 헤매다가 지쳐 떨어져 죽고 만다고 합니다. 곧 <침묵의 봄>이 오는 건 아닐까요?  우리가 어쩌다 건강을 잃어보면 우리 삶에서 무엇이 본질이고 비 본질인지 스스로 알게 됩니다. 무엇이 가장 소중하고 무엇이 그저 그런 것인지 저절로 판단이 서지요. 그리고 그동안 내가 살아온 삶의 자취가 비로소 보이고 값있는 삶이였는지 무가치한 삶이였는지도 구분이 됩니다. 언젠가 우리는 지녔던 모든 것을 놓아 버릴 때가옵니다. 내려놓기! 그때 가서 망설이지 않도록 두 손 다 펴보이는 연습을 미리 해두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그래야 진정한 자유인이 되겠지요. 그리고 내 몸이 성할 때 순간순간을 꽉 차게 살아야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한 제자가 스승에게 물었습니다. "죽고 나면 어떤 일이 벌어집니까?" 스승이 대답합니다. "시간 낭비하지 말게, 자네가 숨이 멎어 무덤 속에 들어가거든 그때 가서 실컷 죽음에 대해서 생각해보게, 왜 지금 삶을 제쳐 주고 죽음에 신경을 쓰는가? 일어날 것은 어차피 일어나게 마련이다." 저도 한 때 죽음을 동경하고 죽음의 미학을 설파한 적도 있습니다. 그러나 막상 죽어 보니까 죽음만큼 절망적이고 캄캄한 것이 또 없었습니다. 죽음에서 살아나 보니까 알겠더군요. 우리에게 가장 소중한 것은 지금 이곳에서 깨어 있음입니다. 신앙이란 관념적이고 추상적인 회색의 이론이 아니라 순간순간의 구체적인 삶을 말합니다. 삶이 곧 영성입니다. 삶은 과거나 미래에 있지 않고 바로 지금 이 자리에 이렇게 살고 있음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삶의 비참함은 죽는다는 사실보다도 살아 있는 동안 우리 내부에서 무언가 죽어 있다는 것이지요. 믿음으로 단번에 어떻게 될 것처럼 요란 떨기는 쉽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은혜가 아닙니다. 은혜란 한 걸음씩 점진적으로 나아가 마침내 새것이 되는 것이지요. 이렇게 삶을 바꾸는 사람만이 은혜를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조국에 엄청난 바람이 불고 있습니다. 오랫동안 존재감도 없던 조선의 여성들이 # Me too를 외치며 오천년 동안 구석구석에 겹겹이 쌓여온 진짜 적폐를 몰아내고 있습니다. 정치도 종교도 교육도 문화도 못했던 적폐청산의 폭풍을 일으키고 있습니다. 우리 대한의 처자들이 얼마나 위대한지요. LPGA는 이미 그들의 손안에 있습니다. 여자 양궁은 세계 누구도 넘보지 못합니다. 김연아는 그렇다치고, 이번 평창 동계올림픽 스노우보드에서 금메달 딴 17살짜리 <클로이 킴>은 얼마나 예쁩니까? “영미! 영미! 영미!”와 # Me too의 봄바람으로 우리 대한민국이 완전히 거듭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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