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누구인가? 대통령은 나를 ‘국민’이라 부르며 “국민의, 국민에 의한, 국민을 위한” 일을 한다고 합니다. 그러나 조금도 ‘나의, 나에 의한, 나를 위해’ 대통령이 일한다는 실감이 나지 않아 ‘다음에 보자’는 속 공갈로 자위할 뿐입니다. 국회의원들은 나를 ‘유권자’라고 부르며 한 표를 보고 귀하신 손을 내밀지만, 손의 온기도 식기 전에 돌아서는 뒷모습은 왜 그렇게 이질스러울까요? 텔레비젼은 나를 ‘시청자’라고 부르며 늘 “시청해줘서 고맙다”고 합니다. 별게 다 고맙습니다. 극장은 ‘관객’, 음악회는 ‘청중’, 박물관은 ‘관람객’, 마켓은 ‘손님’, 비행기는 ‘탑승객’이라고 부르고 입국심사대 앞에서면 나는 급기야 ‘내국인’이 됩니다.(나는 이중국적 어르신입니다. 한국은 어딜 가도 나를 ‘어르신’이라 부릅니다) 국세청은 나를 ‘납세자’라고 부르고, 병무청은 나를 ‘예비역 병장’이라 하고, 시청은 나를 ‘시민’이라 하고, 동사무소는 나를 ‘동민’으로 취급하며 주민세를 받고, 병원에 가면 졸지에 ‘환자’도 되지만, 사랑하는 성도들에게는 일탈을 좋아하는 ‘아웃사이더 목사’입니다. 이 밖에도 엄청난 타이틀이 가능합니다.

    이 번거로운 인간관계를 피해 오로라에 칩거(?)하고 있는데 본의와는 상관없이 이 모든 정체성이 어느새 나를 휘감고 있습니다. 꿈자리도 뒤숭숭 할 때가 많습니다. 그래서 <마르크스>가 인간이란 “사회적 관계의 총체”라고 했는데 아마 이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사실 ‘나’라는 인간의 정체성을 이루는 이 모든 서술어들은 모두 이 사회적 관계의 표현이지요. 가령 조국에게 나는 ‘Korean’이며, 어머니에게 나는 ‘아들’이며, 아내에게는 ‘남편’이고, 아이가 태어나면서 졸지에 ‘아빠’가 됩니다. 나를 ‘멤버’라고 부르는 조직에 가면 나는 선배의 ‘후배’이고, 후배들의 ‘형님’이자 ‘오빠’로 처신해야 합니다. 인간이 저 혼자서 정체성을 갖는다는 것은 불가능한 것이 확실합니다. 정체성을 갖는다는 것은 이 복잡한 인간관계의 틀 속에 들어가는 것을 의미하며 동시에 거기에 걸맞게 처신하는 것을 뜻하지요. 정체성이란 나를 특정 방식으로 움직이는 물리적 힘입니다. 국가가 이런 힘으로 작용하기도 합니다. 그게 파쇼(국가주의)입니다. 물론 나는 이 ‘힘’에 저항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대가는 상당히 씁니다. 이런 몇몇 주체들의 경험이 ‘나서면 죽는다’는 불변의 진리를 낳은 것이리라 추측합니다. <보헤미안의 십계명>이라는 게 있습니다. ‘나라 보기를 강 건너 불 보듯 하고, 부모 보기를 우습게 알고, 형제 보기를 개떡으로 알며, 친구 배반하기를 밥먹듯 하라’ 대충 이런 내용인데, 물론 대책 없는 아웃사이더가 되라는 뜻이 아닙니다. 인간관계의 틀이 답답한 구속으로 작용하는 현실에 그것을 대체할 새로운 관계의 유형을 만들어내려면 과감히 ‘보헤미안’이 되어야 한다는 뜻이지요. 그런데 우리 이민사회에서 보헤미안의 흉내를 내며 사는 것이 지극히 위험하다는 것이 저의 확실한 경험입니다. 우리 Korean은 인간관계의 점성(끈적끈적함=정)이 워낙 강하기 때문입니다. 아웃사이더를 버리고 차라리 그 속에 깊이 들어가는 인사이더가 되는 것이 훨씬 더 자유롭다는 것이 어르신이 되면서 점점 깨닫게 되는 지론이기에, Post-insider(초월적 인사이더)가 되려고 합니다.

    나비 효과라는 말이 있습니다. ‘미국 월가의 날갯짓이 지구 반대편에서는 폭풍을 일으킨다’는 말이지요. 요즘 평양의 날갯짓이 우리 조국 남한에 폭풍을 일으키고 있습니다. ICBM(대륙간 탄도미사일)의 날개가 아니라 평창+평양=평화라는 Three Pyung 날갯짓입니다. 우리 평창올림픽에 엄청난 바람을 일으키고 있습니다. 예술단, 태권도 시범단, 미녀응원단, 북한 정권의 거물들이 속속 남한에 들어오고 있습니다. 물론 비판적인 말도 많이 있지만, 우리 남한이 주체적 선택을 하는 평창 올림픽이 얼마나 또 좋은 기회입니까? 북의 정체성은 무엇입니까? ‘주적’입니까? ‘같은 민족’입니까? 아무리 북이 미워도 민족의 이익을 저버릴 수는 없는 일입니다. 그리고 항상 큰 사람이 작은 사람을 끌어안아 주는 법이지요. 일본이 왜 북의 핵 위협을 강조합니까? 그걸 빌미로 자기들도 핵으로 재무장하기 위해서입니다. 평창올림픽 기회를 통해서 북도 핵을 내려놓고, 우리 조국 남한의 정체성도 더 균형화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래야 나는 자랑스러운 Korean입니다. 이 미국에 살며 갈등하는 우리 자녀들의 정체성(Identity)도 분명해져야 하지 않겠습니까? 평창 올림픽 파이팅! 성경은 우리의 존재를 이렇게 규정합니다. ‘너는 하나님의 사랑받는 자녀이며, 세상의 빛이며, 소금’이라고 말이지요. 신앙이란 ‘To do’가 아니라 ‘To be’입니다. 그러므로 도덕적 변화를 강조하기 전에 정체성의 변화가 선행되어야 합니다. 도덕적 변화는 정체성의 변화 뒤에 자연스럽게 따라오는 것입니다. 고로 정체성을 잃어버릴 때, 우리 인생은 위험에 처합니다. 자기 정체성을 알지 못하는 사람은 내적 무게가 없어 침몰해 버립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사랑받는 사람으로서의 정체성과 이루어야 하는 꿈이 서로 상호작용하는 인생이 가치 있고 아름답습니다. <나의 존재미학>을 살펴봐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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