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에 김병삼 목사님(분당 만나교회 담임)이 쓰신 ‘사랑이 먼저다.’(Love first)라는 책을 읽었습니다. 목사님은 이 책에서 지금 우리가 사는 세대를 ‘사랑의 실체가 없는 세대’라고 정의하면서 진정한 사랑 없이 살아가는 삶의 모습을 이렇게 언급합니다. “요즘처럼 사랑이라는 말이 흔한 때가 없었던 것 같습니다. 수많은 광고, 영화, 드라마의 주제가 사랑을 빼면 이야기가 안 됩니다. 하지만 얼마 전까지만 해도 자연스럽게 ‘사랑한다’는 말을 하기에 참 어색했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요즘 젊은이들은 우리보다 더 훨씬 ‘사랑해’, ‘사랑합니다’ 이런 말을 잘합니다. 그런데 사랑이라는 말은 그렇게 쉽게 많이 하면서 왜 우리는 서로 상처를 받고 서로 사랑하지 못하고 스스로 견디다 못해 목숨을 끊는 사람들이 점점 더 많아지는 시대를 살아가는 것일까요? 사랑을 그렇게 많이 말해도 사랑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려고 해도 사랑하는 방법을 모르는 세대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랑을 많이 말할수록 어쩌면 사랑하지 못하고 사랑받지 못하기 때문에, 오히려 사랑 때문에 분노가 일어나는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면서 맥스 루케이도가 쓴 ‘루케이도에게 배우는 사랑’이라는 책 중에 한 대목을 이렇게 인용합니다.

    “‘서로 사랑하십시오.’ 성도들에게 그렇게 말한다. ‘인내하고 친절하게 대하며 서로 용서하십시오.’ 이렇게 강권한다. 그러나 성도들에게 사랑하라고 가르치면서 그들이 사랑받는 존재임을 말해주지 않는 것은 마치 그들에게 수표를 남발하라고 권하면서 은행 계좌에는 입금 해 주지 않는 것과 같다. 너무나 많은 관계가 마이너스 통장과 같은 신세가 된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결과이다. 우리 마음에는 충분한 사랑이 없다.” 이 글을 잃는 동안 ‘사랑의 실체가 없는 세대’, ‘마이너스 통장과 같은 관계’라는 문구들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습니다. 그러면서 나 자신을 향해 이런 질문을 던져 보았습니다. ‘오늘 나는 진정 실체가 있는 사랑을 하고 있는가?’ ‘입술로는 다른 사람을 위한 사랑의 수표를 남발하면서 실제로는 그들의 필요를 위한 계좌 입금을 해 주지 않는 말로만의 사랑을 하고 있지는 않는가?’ 이 질문들이 내 마음속을 이리저리 헤집고 다니다가 어느 순간 신약의 한 성경 구절에 화살이 되어 꽂혔습니다. “만일 형제나 자매가 헐벗고 일용할 양식이 없는데 너희 중에 누구든지 그에게 이르되 평안히 가라, 덥게 하라, 배부르게 하라 하며 그 몸에 쓸 것을 주지 아니하면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야고보서 2:15-17)

    어쩌면 이 구절들은 실체가 없는 사랑과 마이너스 통장 같은 사랑의 관계를 설명하는 야고보식 버전이 아닐까 싶습니다.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 여기서 말하는 유익은 다른 사람에 대한 유익을 말하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을 유익되게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진정한 사랑이겠지요. 그 사람의 실제적인 필요를 채워 주는 것입니다. 말의 위로가 필요한 사람에게는 말로 위로할 때 유익이 됩니다. 헐벗은 사람에게는 옷을 입혀 주어야 유익이 되겠지요. 하루 먹을 양식이 없는 사람에게는 먹을 것을 주어야 유익이 될 겁니다. 야고보가 예로 든 사람은 뭐가 필요한 사람입니까? 입을 옷이 필요하고 먹을 음식이 필요한 사람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그 몸에 쓸 것을 주지 않고 말로만 위로합니다. 말로만 ‘평안히 가라’고 합니다. 이 말은 일반적으로 유대인들이 사용했던 통례적인 인사말입니다. 말로만 ‘더웁게 하라’고 합니다. 이 말은 스스로 불을 지펴서 몸을 덥히라는 것입니다. 얼마나 공허한 위로입니까? 말로만 ‘배부르게 하라’는 것입니다. 이 말의 본래 의미는 가축을 방목해 놓고 스스로 풀을 찾아 먹게 하는 것입니다. ‘네가 알아서 스스로 찾아 먹어라’ 이런 무책임하고 공허한 위로의 말이 어디 있습니까? 다른 사람의 실제적인 필요를 채워주는 것을 외면한 채 말로만 하는 것은 살아있는 믿음도 아니고 진정한 사랑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행해야 할 행함의 본질이 무엇입니까? 그리스도의 사랑을 실천하는 것 아닙니까? 그 사랑이 무엇입니까? 나 자신의 유익을 구하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그 유익이 다른 사람에게도 유익이 되게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진정한 사랑입니다. 이것이 실체가 있는 사랑 아니겠습니까? 사도요한 선생님은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말고 행함으로 하자’고 권면합니다. “누가 이 세상의 재물을 가지고 형제의 궁핍함을 보고도 도와 줄 마음을 닫으면 하나님의 사랑이 어찌 그 속에 거하겠느냐 자녀들아 우리가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말고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자”(요한복음 3:17-18)

    인도의 민족지도자였던 간디가 먼 지방으로 강연을 가게 되었답니다. 하루 종일 바쁜 일정에 쫓기다 보니 어느새 기차 시간이 임박해 있었습니다. 간디는 그를 따라나선 사람들과 함께 급히 역으로 달려갔습니다. 기차가 막 출발하려 했습니다. 간디의 일행들은 숨 돌릴 틈도 없이 급히 기차를 탔습니다. 가까스로 기차에 올라탄 간디와 일행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 순간 간디가 짧게 외쳤습니다. “앗! 내 신발이....” 급히 기차를 타는 바람에 그의 발이 발코니에 걸리면서 그렇지 않아도 헐렁했던 신발 한 짝이 벗겨진 것입니다. 결국 간디의 신발 한 짝은 플랫폼 바닥으로 떨어지고 말았습니다. “이를 어쩌나....” 사람들은 안타까워하며 창밖으로 고개를 내밀었습니다. 하지만 이미 기차가 제 속도를 내며 달리고 있었으므로 그 신발을 주울 수는 없었습니다. 신발 한 짝은 그들의 애타는 마음을 뒤로 한 채 조금씩 멀어지고 있었습니다. 그 순간 간디가 다른 쪽 신발 한 짝을 벗더니 조금 전에 떨어진 신발이 있는 곳을 향해 힘껏 던지는 것입니다. “선생님, 두 발 다 맨발로 어쩌려고 그러십니까?” 간디의 행동에 놀라 동행했던 사람들이 물었습니다. 그러자 간디가 미소를 지으며 이렇게 말했고 합니다. “어떤 가난한 사람이 바닥에 떨어진 신발 한 짝을 주웠다고 상상해보십시오. 그에게는 그것이 아무런 쓸모가 없을 겁니다. 하지만 이제는 나머지 한 짝마저 갖게 되지 않았습니까?” 어쩌면 간디야 말로 ‘실체가 있는 사랑’을 실천한 사람이 아닐까 싶습니다. 오늘 우리는 어떤 사랑에 익숙해져 있습니까? 실체 없이 말로만 하는 사랑입니까? 아니면 기꺼이 다른 사람의 몸에 필요한 것을 채워주는 사랑입니까? “그 몸에 쓸 것을 주지 아니하면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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