캘리포니아에 처음 유학을 와서 공부를 하고 있을 때였습니다. 석사 과정 마지막 학기를 듣는 중에 아주 신실한 한국인 부부를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연세대 의과대학을 졸업하고는 한국에서 모든 의사 수련과정을 마친 재원들이었습니다. 공부를 더하기 위해 캐나다 켈거리로 유학을 오게 되었습니다. 부부가 모두 의사였기에 인생의 푸른 꿈을 꾸면서 공부를 마칠 날을 기다렸습니다. 신앙은 있었지만 형식적인 주일 신자였습니다. 그러던 중 어느 수요일 저녁 학교에서 공부를 하다가 갑자기 교회에 가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고 합니다. 머리도 식힐겸 교회에 갔는데 마침 수요예배에서 같은 학교 학생이 간증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것도 클래스에서 자주 보았던 중국에서 유학온 학생이었습니다.  그때만 해도 중국이 외부로 문을 개방하기 전이었습니다. 어린 초등학교 때부터 철저한 공산주의 교육을 받았기에 교회가 무엇인지 알지도 못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어머니가 새벽 3시만 되면 늘 뒷마당에 나갔다가 한참 만에 들어오시는 것을 보고는 늘 궁금해했습니다. 대학에 들어간 이후 어느 날 새벽 몰래 어머니를 뒤에서 훔쳐보게 되었습니다. 어머니는 장독대 하나를 열더니 어떤 책을 꺼내고는 달빛에 한참 동안 읽은 후에 무릎을 꿇고 기도를 하더랍니다. 그 날 아들은 어머니에게 자초지종을 듣게 되었습니다. 사실 그 집안은 4대를 이어 내려오는 믿음의 가문이었습니다. 이미 1800년대부터 선교사들에게 복음을 듣고는 예수를 철저하게 믿는 집안이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중국이 공산화가 된 이후에는 집안에 성경책도 가질 수가 없었고 더욱이 교회 출입은 금지가 되었던 것입니다. 신앙을 가지고 있다는 말 조차도 할 수 없는 상태였습니다. 아들은 어머니에게서 복음을 듣게 되었습니다. 그리고는 가문의 전통을 따라 신실한 크리스챤이 되었습니다. 그런 그가 캐나다에 유학을 오게 되었고 교회에서 그 간증을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우연히 수요 예배에 참석했다가 젊은 의사 부부는 큰 은혜와 감동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때부터 그들도 신앙이 점점 깊어지게 된 것입니다.

            어느 날 한국 연세대에서 보내온 학교 소식지를 보게 되었습니다. 학교가 설립된 지 100주년이 지났지만 무엇인가 의미 있는 사업을 하지 못했다는 자책을 하면서 이제 갓 외부 세계에 문을 연 낙후된 몽골에 친선병원을 세운다는 사업 계획이 발표되었던 것입니다. 아직 현대식 병원이 전무하던 몽골의 수도인 울란바트로에 연세대에서 전적 지원을 해서 병원을 세우기로 한 것입니다. 그런데 그곳에 가서 봉사할 동문을 찾고 있다는 기사가 눈에 들어온 것입니다. 이들 부부는 동시에 그 적임자가 바로 자기들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결국 그해 학교를 졸업하고는 제가 공부하고 있던 캘리포니아 신학교에 신학을 공부하기 위해 왔던 것입니다. 현직 의사지만 환자들에게 복음을 제시하고 성경공부도 시키며 주님의 제자로 키우려면 신학을 먼저 공부한 후에 현지로 들어가겠다는 계획을 세웠던 것입니다. 저는 그 분들과 1년을 같이 공부하면서 많은 믿음의 대화를 나누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1년 후 학교를 졸업하고 저는 교회를 개척하게 되었습니다. 개척과 동시에 그 분들을 교회 1호 선교사로 몽골에 파송했습니다. 그후 7년 동안 두 의료선교사님은 몽골에서 참 놀라운 사역들을 많이 했습니다. 나중에는 몽골 보건부장관의 표창까지 받을 정도로 몽골 주민들의 삶을 개선시켜 주었습니다. 이제 시작하는 교회에서 파송한 선교사님이지만 교회로서도 큰 자랑이었고 축복이었습니다. 연세대 병원을 세브란스병원이라고 부릅니다. 병원 앞에 사람 이름이 들어가 있습니다. 이름 자체는 우리에게 친숙하지만 그 분이 누군가에 대해서는 많은 사람들이 잘 모르고 있습니다. 연세대가 개교 100주년기념으로 몽골에 연세친선병원을 설립하게 된 것도 바로 세브란스라는 분에 대한 좋은 기억과 감동 때문입니다. 세브란스의 본명은 루이스 헨리 세브란스입니다. 1800년대 후반 미국 오하이오주 클리브랜드에 살았던 의사이자 기업가요 신실한 크리스챤이었습니다. 그는 젊은 시절 석유왕으로 유명한 록펠어와 함께 석유 사업을 시작했습니다. 이들은 하나님이 주신 소명대로 기독교 교육과 해외선교에 그들이 번 돈을 사용했습니다. 우리는 록펠러의 기부에 대해서는 많이 알고 있습니다. 수많은 대학교, 병원, 교회를 설립했습니다. 또한 록펠러에 대한 책들도 많이 출판되어 모르는 이가 없을 정도입니다.

           연세대의 설립과 세브란스 병원의 설립이 다 세브란스에 의한 것이었습니다. 그는 병원 앞에 자기 이름을 넣는 것도 원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학교측에서는 그의 이름을 기억하고 그의 흔적을 간직하고 싶어서 이름을 새겨 넣었던 것입니다. 1900년 어느 날 세브란스는 뉴욕에서 있었던 선교대회에 참석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 당시 조선에서 의료사역을 하고 있던 에버슨 선교사의 연설을 감명깊게 들었습니다. 에버슨은 그때 이런 연설을 했습니다. “조선에 있는 병원들은 병원이라 부를 수 없을 만큼 빈약합니다. 간호사도 없이 한 명의 의사가 모든 것을 운영합니다.” 그의 연설 후 세브란스는 에버슨을 만나 조선에 병원을 세우라고 후원을 약속합니다. 그 당시 그가 후원한 금액이 무려 45,000달러였습니다. 지금 돈으로 환산을 하면 6억 5천만불에 달하는 어마어마한 금액이었습니다. 하지만 세브란스는 병원 준공식에도 참여하지 않았습니다. 1907년 한 차례 다녀갔을 뿐 어떤 간섭이나 관여도 하지 않았습니다. 뉴욕에 있는 장로교 선교회에 모든 행정처리를 맡겼기 때문입니다. 세브란스는 병원만 짓고 후원을 멈춘 것이 아닙니다. 그 후에도 계속 돈을 보내왔습니다. 심지어 그가 죽은 후에도 그의 아들딸이 아버지를 이어 죽을 때까지 돈을 보내왔습니다. 그 후원금은 세브란스와 그의 아들 딸이 교회에 남겨 놓은 기금이었습니다. 그 기금이 떨어질 때까지 한국의 세브란스 병원에 기부하라는 유언을 해 놓은 것입니다. 그러기에 세브란스병원은 초기에 왕을 비롯해서 가난한 백성들 모두가 진료받을 수 있는 자선 병원이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세브란스는 자신의 주치의인 어빙 러들로를 조선으로 보냈습니다. 26년간 외과 전문의로 머물면서 우리나라 의학 발전에 크게 기여했습니다. 세브란스는 1913년 갑작스러운 복통으로 유언도 남기지 못한 채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의 주머니에서 낡은 수첩 하나가 발견이 되었습니다. 그 수첩엔 기부를 약속한 곳의 이름이 빽빽히 적혀 있었습니다. “필리핀 세부 여학교, 중국 체푸 병원, 항주 유니언 여학교, 태국 치앙마이 신학교……” 그는 세상을 떠난 후에도 그 약속이 지켜지도록 기금까지 마련해 두었지만 정작 자신의 명의로는 집 한 채도 없었다고 합니다. 연세대 세브란스 병원은 이런 세브란스의 숭고한 정신을 본받아 몽골에 친선병원을 세웠던 것입니다. 우리가 가진 수첩에는 어떤 것이 적혀 있을까요? 우리가 이 세상을 떠난 다음에는 사람들은 우리에게서 어떤 흔적을 보게 될까요? 한 번 깊이 생각해 보았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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