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요8:32) 예수님이 하신 말씀입니다. 진리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알면(아는 것이 중요함) 모든 운명,팔자,억압,가난,절망,우울,두려움,원수,미움,저주,죽음에서 자유하게 된다는 말씀이지요. 사실입니다. 연세대학교를 설립하신 언더우드 선교사님이 교훈(校訓)으로 정한 말씀이기도 합니다. 얼마 전 그 학교를 은퇴한 유명 교수 마광수씨가 자살했습니다. 저보다도 한 살 밑인데 그 어린것이(?) 왕따 당하고 우울해하다가 목메어 죽었습니다. 이지메(왕따)라는 말이 처음 나왔을 때 그 집단적 범죄의 주인공은 고딩들이였습니다. 다시 그 말을 들었을 때 그때 범인은 중딩이였습니다. 그 후 또 그 말을 들을 때 이번엔 초딩이랍니다. 이제 유치원에 눈을 돌릴 때입니다. ‘왕따 당한 김개똥 원아(무직, 다섯 살) 삶에 회의를 느끼고 투신하다’라는 뉴스가 나올 판입니다.  ‘어린이는 천진난만하다’ 이 말은 수정되어야 합니다. 그건 천진난만한 ‘어른들’이나 믿는 동화입니다. 애들이 노는 걸 보십시오. 얼마나 더럽고 치사하고 비열하고 무서운지 여중딩들의 집단폭력이 고국의 언론을 강타하고 있습니다. 쇠파이프, 소주병, 각목으로 왕따의 대상을 죽도록 패고 SNS에 올려 조직의 힘을 과시합니다. 그 중딩들이 원조교제(돈을 받고 性을 파는 것)도 한답니다. ‘어린애는 더 이상 어린애가 아니다’는 것이 여론의 결론입니다. 물론 저희 때도 왕따는 있었지요. 저도 종종 당했습니다. 세계에서 제일 높은 산은 ‘에레베스트’가 아니라 ‘에베레스트’라고 진리를 말한 대가로 난 가끔 놀이집단에서 이지메를 당해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지독하지 않았습니다. 길어야 며칠이면 해제되고 나는 다시 아무 문제없이 조직에 섞일 수 있었습니다. ‘잠수함의 프로펠러’라는 말을 ‘잠수함의 스크류’라고 나서서 교정해주기 전 까지는... 나서는게 문제입니다. 똑똑한 Out sider가 탈이지요. 마광수씨는 삼십대에 연대 교수가 된 천재입니다. 80년대 성애문학(性愛文學)의 창시자로서 <장미여관으로 가자> <즐거운 사라> <나는 야한여자가 좋다>라는 책을 써서 여대생들이 온통 립스틱 짙게 바르고 야한 여자가 되어 성애를 즐기는 사라가 되는 통에 인기가 짱 이였습니다. 고무된 그는 학교의 교훈도 뒤집어 ‘자유가 너희를 진리되게 하리라’며 외쳐댔습니다. 그가 말하는 자유는 한마디로 성애입니다. 성(性)의 억압에서 자유하라는 거지요. 그게 진리랍니다. 결국 근엄한 전두환'가카'께서 ‘뭐라카노, 이 자슥이..’ 하는 바람에 모든 저서는 판매금서가 되고(지금까지) 감옥까지 다녀왔지요. 다시 복직은 되었지만 그때부터 성애라는 외설과, 문학이라는 예술사이의 줄타기를 하면서, 외설로 부터도 왕따 당하고 예술로부터도 왕따 당하는 외톨이가 되었습니다. 무척 외로웠습니다. 은퇴 후 그는 더 외로웠습니다. 그래서 ‘나는 억울하다’는 말을 남기고 극단적으로 세상을 떠났지요. 그게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자유가 너희를 진리되게 하리라’로 엎어버린 천재의 일생입니다. 학문적 타당성은 실험이나 연구를 통해, 생각하고 증명하는 과정을 통해 밝힐 수 있습니다. 그러나 진리는 학문과 다릅니다. 진리에 관해는 ‘와서 보는 것’(요1:46)이 중요합니다. ‘맛보아 아는 것’(시34:8)이 중요합니다. 그래서 선지자 호세아는 ‘우리가 여호와를 알자 힘써 여호와를 알자’(호6:3) 외치며 ‘내 백성이 지식이 없으므로 망하는도다’(호4:6)라고 한탄했습니다. 와서 성경을 보십시오. 그리고 맛보아 아십시오. 비로소 진리 앞에 ‘유레카!’할 것입니다. 그러나 깨달음보다 더 중요한 것은 용기입니다. 믿음대로 실천하며 사는 용기 말이지요. 물리학자 칼 프리드리히 바이체커(Carl Friedrich von Weizsacker)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자신이 믿는 것이 진리라면 어떻게 살아야 할까? 바로 그 식대로 사는 삶이 곧 믿음이다” 진리를 진짜 깨달았다면, 그 깨달음은 사람의 변화로 나타납니다. 진리는 우리의 삶 속에 체화(Incarnation)되고, 진리를 보증하는 것은 우리의 달라진 삶입니다. 요한복음 1:14절의 말씀대로 ‘말씀이 육신 되는 것’입니다. 당신은 예수님을 사랑합니까? 혹 다른 사람이 틀린 방식으로 예수님을 사랑한다고 함부로 판단하지는 않습니까? 그렇다면 꼭 기억하십시오. 하나님을 경험하는 문은 영적으로 가난한 사람에게 열립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마5:3) 우리는 다른 사람의 머리가 되어 그들을 가르치려고 그 사람 앞에 선 것이 아닙니다. 설교하지 말고 다만 진리를 설명하십시오. 세상은 설교에 식상해 있습니다. 우리가 진리(예수 그리스도)를 설명할 때 당신의 지식이 하나님에게서 왔음을 알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은 있는가?” 하는 물음은 ‘예’ 또는 ‘아니요’로 간단하게 대답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어떤 분인가?”하는 질문은 전혀 다릅니다. 이런 물음에는 깊은 고민과 갈망이 있습니다. 믿음이란 이 질문에 자신의 삶으로 대답하는 것입니다. 그 대답은 진리가 체화된 사람만이 할 수 있습니다. 하나의 사물은 다른 사물을 거울처럼 비춰주는 모나드(단자 單子)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진리)를 증명하는 방법, 문학적 몽타주, 나는 말할 것이 없습니다. 다만 보여줄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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