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말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당선되면서 그가 제일 먼저 시작한 일은 ‘오바마 지우기’였다. 현재 미국 이민사회를 뜨겁게 달구고 있는 청소년 불체자 유예 프로그램(DACA) 철회도 그 연장선이라 볼 수 있다. 트럼프의 오바마 유산 지우기 전략은 오늘도 계속되고 있다. 오바마케어는 미국에 처음 도입된 전국민 건강보험으로, 오바마 정부가 공을 들인 정책이었다. 하지만 트럼부 정부는 오바마케어 폐지를 최우선 의제라고 천명하면서 곧바로 폐지 수순에 들어갔다. 오바마케어는 의무적으로 건강보험을 제공한다. 특히 무보험자의 의료보험 가입을 의무화 하면서 저소득층 의료 보조금 지급을 확대했는데, 반대로 트럼프케어는 의무 가입제와 보조금 폐지를 중점으로 하고 있다. 트럼프의 눈물겨운 노력으로 인해, 트럼프케어는 가까스레 지난 5월 연방하원을 통과했다.

          하지만 트럼프케어가 실행되면 2,300여만 명이 무보험자로 전락하게 되거나, 높은 디덕터블을 내야 해서 환자 부담이 높아지게 된다. 결국 지난 7월 트럼프케어는 연방상원 통과가 무산되면서 사실상 백지화 되었다. 이에 화가 난 트럼프는 급기야 오바마케어 등록 방해 작전까지 펼치고 있다. 오는 11월부터 시작되는 2018년 오바마케어 등록기간을 앞두고, 최근 오바마케어 등록을 돕고 있는 소위 ‘네비게이터’ 제공 업체 2곳의 2,200만달러 상당의 계약이 돌연 취소된 것으로 확인되면서 트럼프 행정부가 오바마 케어 등록 방해를 통해 오바마 케어를 무력화시려는 시도를 하고 있다는 의혹이 일고 있다. 이들은 시카고와 필라델피아 등 18개 대도시의 교회와 공립도서관 등에서 네비게이터를 통해 오바마케어 등록과 갱신을 도와줬던 업체들이다. 오바마 전 대통령의 부인 미셸 오바마 여사가 주도했던 '학교급식 건강식단'도 희생양이 됐다. 2010년 도입된 현행 학교 건강식단 급식법은 학교급식에 과일과 채소, 통밀 등 정제되지 않은 곡식을 포함하고 지방과 염분을 줄이는 등 학교급식의 영양 기준을 높이는 것을 핵심내용으로 하고 있는데, 미셸 여사가 이 법의 전파를 주도해 왔었다. 그런데 지난 5월 트럼프는 학교 건강식단 급식법에 따른 현행 급식 기준을 사실상 폐기하는 수순을 밟았다. 지난 7월에는 트랜스젠더의 군복무 전면 금지 방침을 밝혔다. 이 또한 ‘오바마 지우기’ 작업의 일환이다. 트럼프 대통령은 트위터에 “우리 군대는 결정적이고 압도적인 승리에 집중해야 한다. 군대 내 트랜스젠더가 야기할 엄청난 의학적 비용과 혼란의 짐을 떠안을 수 없다”고 단언했다. 미국에서 트랜스젠더 군 복무는 오바마 정부 시절에 허용된 것이다. 현재 미군에는 트랜스젠더 병력이 수천명에 이를 것으로 추산되고 있다.  트럼프 대통령은 또 오바마 전 대통령이 임기 말 행한 온실가스 감축과 관련한 환경규제 등의 행정조치 시행도 보류시켰다. 그는 오바마 대통령이 추진해 온 화력발전소 온실가스 감축 의무화, 수질오염 방지 등 기후변화 대응책을 저지하기 위해 에너지 기업들과 함께 집단 소송을 주도해 온 인물을 환경청장에 앉혀 오바마 행정부가 도입한 각종 환경규제 정책을 철폐하는데도 주력했다. 트럼프는 기후 변화는 ‘사기(hoax)’라고 주장하면서 지난 6월 파리 기후변화협정 탈퇴를 선언한 데 이어 8월에는 유엔에 탈퇴 의사를 공식 통보했다. 그러다가 최근 미국에 유리한 조건을 제시하면 탈퇴를 안 할 수도 있다는 애매한 입장을 전달하기도 했다.

          트럼프는 오바마 정부의 또 하나의 중요 정책인 이민문제를 뒤엎고 있다. 그는 대통령 취임 직후부터 지속적으로 불체자들에 대한 단속 강도를 높여왔으며, 급기야 2주전에 오바마의 ‘DACA(다카)’를 뒤집었다. 80만 불체 청년의 꿈인 DACA 프로그램이 폐지된 것이다. DACA 프로그램은 오바마 정부에서 시행된 것으로 어려서 부모를 따라 미국에 들어와 불법체류자가 된 젊은이들의 추방을 유예한다는 내용을 골자로 하고 있다. 이에 따라 DACA 수혜자 국가별 순위 5위인 한국은 최대 3만여 명의 불체 청년이 추방위기에 놓이게 됐다. 오바마 전 대통령을 비롯해 각 주의 정치인들과 경제인들, 대학생들까지 거세게 반발하고 나서자 트럼프는 6개월 안에 법안으로 처리하라며 얼렁뚱땅 이를 의회로 떠넘겨버렸다. 그러나 DACA 폐지도 트럼프케어와 마찬가지로 의회 통과가 무산되면서 기존의 체제가 계속 유지될 것이라는 관망이 지배적이다. 지금까지 트럼프의 행적을 분석해보면 오바마가 했던 정책들을 모두 싫다고 뒤집고, 혹여 의회통과가 안되면 이름이라도 바꿔서 다시 시행하겠다는 의도가 다분하다. 정치적 이해타산에 따라, 오바마의 업적을 종식시키고 의회의 다수당인 공화당을 등에 업고 대체 법안을 통해 자신의 업적으로 재탄생시키려는 꼼수인 것이다. 사실 오바마 대통령이야말로 역대 미국 대통령 중에서 추방을 제일 많이 시킨 대통령이다. 대통령으로 당선된 이후 약 40만 명의 불체자를 추방시켰을 정도다. 그런 오바마가 2012년 11월에 있었던 대통령 재선거 약 3개월 전에 DACA 행정 명령을 발동했다. 추방을 시키다가 추방을 중지하는 ‘병주고 약주는 식’의 정치적 행보로 오바마는 소수 이민자의 지지와 함께 재선에 무난히 성공할 수 있었다. 20% 이하의 지지율을 기록하고 있는 트럼프도 이러한 전략을 재탕할 계획일 수도 있다. 하지만 이렇게 오락가락 무차별적으로 오바마의 유산을 지우겠다는 트럼프로 인해 고통받는 사람들은 저소득층, 고령자, 불법체류 학생들뿐만 아니라, 미국이 세계 최강대국이라고 믿고 있는 국민들도 자존심에 상처를 입을 수 있다.

         지금 한국에서는 박정희 지우기가 한창이다. 딸 박근혜 전 대통령의 탄핵 이후 분위기는 더하다. 박정희 탄생 100주년을 맞는 올해를 기념하기 위해 ‘박정희 우표’ 발행도 찬반이 갈렸고, 생가가 문화재로 지정이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취하 소송도 잇따르고 있다. 정권이 바뀌었다고 해서 늘 해왔던 대통령 기념우표 발행, 대통령 생가 문화재 지정 같은 당연한 수순까지 거부하는 모습은 바람직해 보이지 않는다. 무엇보다 새마을운동의 의도까지 지우겠다고 나선 현 정부의 모습은 나약해 보이기까지 하다. 정부의 개도국 지원 업무를 하는 한국국제협력단은 내년부터 해외에서 새마을운동과 관련한 공적개발원조 신규 사업을 추진하지 않을 방침이라고 한다. 기존의 26개 사업도 10개로 재편하고 사업 명칭에서 아예 '새마을'을 삭제한다. 아프리카 르완다는 한국에서 간 새마을 봉사단과 함께 황무지를 개간해 쌀을 수확함으로써 3년 만에 주민 소득의 2배를 늘렸다. 이에 폴 카가메 르완다 대통령은 2015년 유엔 총회에서 "한국의 새마을운동은 르완다뿐 아니라 다른 나라들에도 영감을 주고 있다"고 했다. 제프리 삭스 미 컬럼비아대 교수는 "새마을운동의 '캔 두(can do/할 수 있다)' 정신이 있다면 세계 절대 빈곤을 종식할 수 있다고 본다"고 했다. 원조를 받는 나라에서 원조를 하는 나라로 발돋움한 한국에 대한 평가였다. 아프리카, 아시아, 중남미 등 전 세계 개발도상국에서 새마을운동을 배우러 한국을 찾고 있다. 작년 한 해 동안만 38개국이 경기도 성남에 있는 새마을운동 중앙연수원을 찾아 교육을 받았다. 학생들도 있다. 지금까지 누적 인원을 따지면 6만여 명에 달한다. 근면·자조·협동은 지금의 대한민국을 만든 위대한 정신적 유산이다. 아무리 박정희가 이룬 모든 것들을 역사에서 지우려 한다 해도 이건 아니다. 이 시점에서 문재인 정부도 무조건 전 정권의 흔적을 지우고 싶어하는 트럼프의 모습을 보면서 교훈을 얻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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