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V에서 이런 장면을 보았습니다. 저 아프리카에서 야생동물을 지키는 부부가 길을 잃은 사자새끼를 주어다가 집에서 키우면서 우유주고 목욕시켜주고 같이자고 그랬더니 이 사자가 강아지 노릇을 합니다. 그래서 이 부부는 ‘사자가 이렇게 사람하고 집안에서 사는 것은 사자로써도 불행한 일이다’ 생각하고는 정글로 데려갑니다. 마침 숫 사자를 만난 이 부부는 이 강아지사자를 멀리서 내려놓았습니다. 그랬더니 이 강아지사자가 범 무서운줄 모르고 ‘야 저기 나하고 닮은게 있구나’하고는 꼬리를 흔들며 다가가는데, 숫 사자가 벌떡 일어서면서 갈기를 세우고 이빨을 드러내며 코를 벌렁벌렁하더니, ‘야 이놈은 비누로 세수하는 브루죠아구나’ 싶던지 그 큰발로 강아지사자의 얼굴을 확-할켜버립니다. ‘깨깨갱’ 비명을 지르며 도망쳐온 이 강아지사자를 부부는 다시 데리고와서 치료해주고 몇일 있다가 또 다시 나갑니다. 이번에는 사자 떼가 있는 곳을 가서는 ‘저기는 새끼들도 있으니 받아주겠지’ 하면서 보냈는데, 이번에는 아예 단체로 달려듭니다. 물고 뜯고 밟고 아예 죽이려고 덤벼듭니다. 그래서 공포탄을 쏘면서 쫓아간 이 부부가 다시 구해오고... 이러기를 몇 번 하는중에 이 강아지사자에게 야성이 돌아오고 눈빛이 살아나고, 그러다가 결국 이 강아지사자는 다른 사자들과 함께 정글로 돌아가고 다시는 돌아오지 않는, 그것을 보면서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 진정한 자유가 없는 인생은 아무리 편안해도 참 인생이 아니다....’

수년전 일본에서 남자들에게 ‘가장 부러운 삶은 어떤 삶인가?’라는 앙케이트를 조사했더니, 거기서 나온 가장 부러운 삶 첫째가, ‘새처럼 날아다니는 것’이였습니다. 하루종일 직장에 묶이고 일에 매이고 집에가면 아내에게 눌리고...그래서 훨훨 날아다니는 새가 가장 부럽다는 거지요. 두 번째 답은, ‘가정주부가 되는 것’이였습니다. 그저 남편이 벌어다주는 돈 쓰고, 남편나가면 낮잠자고, 친구들 만나 식당에서 희희낙락하고, 가정주부는 얼마나 자유롭고 좋으냐는 것입니다. 주부들이 들으면 펄쩍 뛰겠지만 하여튼 인간은 이렇게 자유를 추구하는 존재입니다. 오죽하면 ‘자유가 아니면 죽음을 달라’고 외치겠습니까? 그럼 어디에 참된 자유가 있는걸까요? 이 자유의 나라 미국에서 사는 우리는 과연 자유하고 있습니까?

사람은 본질적으로 어딘가는 묶여야 하는 존재입니다. 그래서 ‘사회적 동물’이라고도 하는데, 묶이지 않으면 살기 어렵지요. 그래서 왕따(이지매) 당하는 아이들이 소속감을 잃은 상실감 때문에 총도 쏘고, 자살도 하고 그러는 것입니다. 이렇게 사람은 어딘가에 묶이고 소속되어야 하는데, 크게 보면 두가지입니다. 하나는 마귀에게 묶인 죄(Sin)의 종이고, 또 하나는 하나님에게 묶인 의(Righteousness)의 종이지요. 이 상반된 논리가 주는 교훈은 간단합니다. 죄에서 자유하면 의의 종이 되고, 의에서 자유하면 죄의 종이 된다는 사실입니다. 사람은 딱 이 두가지입니다. 둘에서 다 자유하는 길도 없고, 둘에 다 묶이는 길도 없고, 중간은 더더욱 없습니다. 둘 중의 하나인데, 사실 죄의 종으로 사는 것이 의의 종으로 사는 것 보다는 훨씬 더 쉽습니다. 왜냐하면 죄의 종은 타고난 본능과 성향대로 살면 되기 때문이지요. 타락한 인간은 본래 태생적으로 죄에 더 익숙합니다. 죄가 더 재미있습니다. 죄에 더 자연스럽고 자유합니다.

그래서 죄의 종으로 살면 더 재미있고, 더 내 마음대로 살 수 있고, 더 빼앗을 수도 있고, 더 속일수도 있고, 더 가질 수도 있지만, 그러나 정말 죄에서 자유를 맛본 사람은 아무리 힘들고 어려워도 의의 길을 갑니다. 마치 정글로 돌아간 사자가 아무리 싸우고 할키우고 죽도록 고생해서 겨우 먹이를 구해도 결코 비누 세수하는 집으로 다시 돌아오지 않은 것처럼... 왜 그럴까요? 우리 인간을 창조하신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너희가 죄의 종이 되었을 때는 의에 대하여 자유하였느니라, 너희가 그때에 무슨 열매를 얻었느뇨 이제는 너희가 그 일을 부끄러워 하나니 이는 그 마지막이 사망임이라..’(롬6:20-21) 여기 사망이라는 말이 영원한 불지옥 심판이라는 뜻이지요. 그러나 다시 이렇게 말씀합니다. ‘그러나 이제는 너희가 죄에게서 해방되고 하나님께 종이 되어 거룩함에 이르는 열매를 얻었으니 이 마지막은 영생이니라..’(롬6:22)

독자여러분! 주 예수를 믿으십시오. 그러면 어떤 죄인이든지, 무슨 죄에서든지, 모든 죄에서 해방되고, 죄의 형벌과 저주와 마지막 사망에서까지 자유자가 됩니다. 현실에도 매이지 않습니다. 절망에도 매이지 않습니다. 돈에도 매이지 않습니다. 고려시대의 시인 <이규보>의 이런 시가 있습니다. ‘산중에 사는 스님/ 달빛이 너무 좋아/ 물병 속에 함께/ 길어 담았네/ 방에 들어와/ 뒤미처 생각하고/ 병을 기울이니/ 달은 어디로/ 사라져 버렸네.../ 인생이란 마치 여름 해변가에서 쥐어본 한줌 모래와 같아서 쥐고 있을 때는 뭔가 쥔 것 같지만, 그 손을 피고 보면 모래는 손가락 사이로 스르르 다 빠져나가고 덩그러니 빈손만 남는 것과 같다는 이치이지요. 스님도 잡을 수 없습니다. 어차피 모래한줌도 가져갈 수 없는 인생! 사람은 어딘가는 매여야 하는데 우리가 어디에 매여야 할까요? 하나님께 매이십시오. 역설적으로 그 길이 참 자유의 길입니다. “죄에 매인 자는 울지만 자유자는 웃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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