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에 고국에서 온 영화 군함도(The Battleship Island)를 보았습니다. ‘국뽕(국수주의) 영화중 하나겠지’라는 선입관과는 별개로 작품성이 뛰어났습니다. (물론 일본에강제 징용돼 비인간적 처우를 받으며 노동당한 분들의 실증과는 차이가 있지만) 종로 일대를 주름잡던 주먹 칠성(소지섭)과 말년(이정현)의 어디선가 본 듯한 치열하게 아름다운 죽음, 광복군 소속 OSS요원으로 잠입한 태양의 후예 송중기의 멋진 활약도 오버랩 되지만, 그중에서도 경성 반도호텔 악단장 이강옥(황정민)이 하나뿐인 딸 소희를 살리려고 애쓰는 모습이 참 눈물겨웠습니다. 결국 그 딸을 송중기에게 맡기며 ‘우리 소희에게 설탕 탄 국수 한 그릇 꼭 먹게 해 달라고...’ 부탁하며 강옥은 죽습니다. 그게 우리 부모님들이 겪었던 일제(日帝)의 탄압과 6·25 전쟁의 잔상이지요. 그런 부모님들이 있었기에 오늘 우리가 있고, 그런 우리가 있기에 우리 자녀들이 있는 것입니다. 영화는 그 딸 소희가 우리 모두를 바라보는 눈빛으로 끝납니다. 그것은 오늘 우리 자녀들을 향한 우리의 눈빛이기도 하고 자녀들이 우리를 보는 눈빛이기도 합니다. 그 눈은 우리에게 많은 것을 묻습니다. 큰 물음표를 가슴에 담고 영화관을 나왔습니다. 그 일본이 카피하지 못해서 안달하는 김치는 가장 우리 것 다운 우리 것의 심볼이기도 하지만 단맛, 쓴맛, 짠맛, 신맛, 매운맛 등 세상에 있는 맛이란 맛은 다 모여 있을뿐 아니라, 그렇게 세상에 있는 맛이 다 모여서 조화를 이룬 나머지 새로운 맛을 하나 더 창조한 것이 바로 제대로 표현할 수 없는 김치 맛입니다. 그 맛은 곧 우리 자녀들이 자라면서 한 가지씩 느껴야 하는 맛이요, 청소년이 되어서 슬기롭게 헤쳐 나가야 하는 맛이며, 어른이 된 다음에도 일상 겪어나가지 않을 수 없는 삶의 맛이기도합니다. 조선 시대의 큰 학자인 토정 이지함 선생은 <대인설>이라는 글에서 ‘대인이란 다 늙도록 가슴에 늘 동심을 간직하고 사는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어른이면서 어른 같지 않는 어른이 맛있는 어른입니다. 사장이면서 사장 같지 않은 사장이 맛있는 사장입니다. 하나님이면서 하나님 같지 않았던 예수 그리스도! 그래서 유대인들이 내쳐버린 그분이 참 하나님입니다. 어린이는 늘 의심이 많습니다. 소희도 눈으로 묻습니다. “왜죠? 잊을 수 있나요? 용서할 수 있나요? 이길 수 있나요? 어떻게 해야 할까요?...”

        고요한 아침, 나는 랩(rap)으로 의심과 대화했습니다. ‘의심, 이 친구야. 자네는 늘 나를 일찌감치 잠에서 깨우지. 자네와 나는 긴 시간을 함께 했지. 사실 난 자네와 함께하는 시간이 그리 유쾌하지는 않아. 하지만 자네에게 감사해. 자네가 없었다면 난 너무 빨리 완고한 꼰대가 되어 버렸을 테니까. 자네는 내게 또 묻고 또 물으라고 다그쳤지. 네가 아닌 자리에 서보라고 재촉했지. 그런 자네가 없었다면 오늘 난 없었을 거야. 요즘 내가 자네에게 시간을 많이 못 내고 있지. 그렇지만 너무 인상 쓰지마. 난 다른 이야기에도 여전히 귀를 기울이려고 애쓰고 있지. 난 이제 자네 물음에말이 아닌 행동으로 대답할거야, 나도 이제 늙었거든...’ 스페인의 철학자 우나무노(Miguel de Unamuno)는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지만 가슴에 불도 없고, 정신적 고통도 없고, 의심도 불안도 절망도 없이 자족하는 사람은 하나님에 대한 생각을 믿을 뿐, 하나님 자체를 믿는 것이 아니다” 의심과 질문과 나를 밀어내기는 우리를 깨어있게 합니다. 때때로 우리는 신(神)의 침묵에 탄식합니다. 그러면서 신이 우리에게 응답했던 지난날과 그 장소나 상황들을 그냥 흘려 넘겨버립니다. 하나님께는 필연이 있을 뿐 우연이란 없습니다. 의심이란 하나님이 우리를 기다리는 곳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지난 번 그 자리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는지 모릅니다. 우리 삶속에 하늘의 문이 있는 장소들이 많습니다. 묻습니다. 당신에게 그런 장소는 어디입니까? 의심은 우리 마음을 흔들지만, 그 과정에서 우리에게 복이 됩니다. 의심이 뚜렷한 답변이나 확신을 주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성도에게 의심은 믿음의 새로운 영역으로 나아가게 합니다. 의심은 전에는 견고함이였으나 이제는 완고함이 되어버린 나를 흔듭니다. 전에는 확신이였으나 지금은 소유가 되어버린 것을 흔듭니다. 전에는 명확함이였으나 지금은 고집이 되어버린 것을 흔듭니다. 전에는 진리였으나 지금은 교리(Dogma)가 되어버린 것을 흔듭니다. 전에는 사랑이였으나 이제는 외식이 되어버린 것을 흔들어 버립니다. 그래서 흔들리지 않는 것만 남게 합니다. 흔들리지 않는 것은 흔들림의 눈물을 통과한 것들입니다. 흔들림의 눈물은 소중합니다. 그것은 우리의 믿음을 강하게 합니다. 믿음이란 때로는 의심으로 작용합니다. 그것은 창조적 의심입니다. 의심은 우리의 속사람이 겪는 성장통입니다. 성장에는 성장통이 따르게 마련이지요. 성경은 의심과 불안과 절망과 항변으로 가득합니다. 고정관념으로 고집하는 나의 꼰대를 깨트리십시요. 다른 자리에 서 보십시오. 위대한 리더 <모세>는 르비딤에서 반석을 쳐물을 낸 고정관념에 묶여 가데스에서 ‘반석에게 명령하여 물을 내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귀로 흘려버리고 여전히 반석을 쳐 물을 냈다가 결국 약속의 땅 가나안에도 들어가지 못하고 생을 마감합니다. 그래서 나는 목사 같지 않은 맛있는 목사가 되렵니다. 나는 의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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