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요를 느끼지 못하는 사람은 절박하지도 않고 따라서 얻지도 못합니다. 그런 사람에게는 신(神)의 빛이 비추지 않습니다. 사슴이 물을 찾아 갈급함 같이 필요를 알고 갈구하는 사람만이 신의 은혜에 몸 담글 수 있습니다. 당신은 목마르지 않으십니까? 예수님이 외칩니다.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오리라’(요7:37-38) 실존적으로 목마른 인생이 목마른 줄 모르는 것이 문제입니다. 세계 피겨 여왕이 되기 위해 김연아는 오천 번의 엉덩방아를 찧었다고 합니다. 은혜란 연습과 노력이 빛을 보도록 해주는 것입니다. 은혜가 거저 주어지는 것이라고 해서 은혜를 우연으로 착각하지 마십시오.  ‘마치 독수리가 자기의 보금자리를 어지럽게 하며 자기의 새끼 위에 너풀거리며 그의 날개를 펴서 새끼를 받으며 그의 날개위에 그것을 업는 것 같이 여호와께서 홀로 그를 인도하셨고 그와 함께 한 다른 신이 없었도다’(신32:11-12) 독수리는 까마득한 절벽위에 가시나무를 꺾어다 둥지를 짓고 그 속에 새끼를 기릅니다. 새끼들의 날개가 어느 정도 힘이 생기면 안락한 가시나무 둥지를 흔들어 새끼들이 가시에 찔려 피를 흘리며 기어 나와 높은 낭떠러지 둥지에서 뚝-떨어지게 합니다. 떨어지는 새끼들은 공중에서 발버둥을 치며 날개를 휘졌습니다. 그러나 첫 비행에 성공할리 없지요. 어느덧 땅에 떨어질 찰나 어미 독수리가 휙-날아와 새끼를 업어 올라갑니다. 높이 올라가서 또 떨어뜨립니다. 그 연습을 반복해서 비로소 높은 창공을 비상하는 독수리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독수리입니다. 그게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유다는 사자 새끼로다 내 아들아 너는 움킨 것을 찢고 올라갔도다 그가 엎드리고 웅크림이 숫사자 같고 암사자 같으니 누가 그를 범할 수 있으랴’(창49:9) 사자는 새끼들을 때가되면 낭떠러지로 떨어뜨립니다. 몇 번이고 떨어뜨려서 거기에서 올라오는 놈은 살리고 못 올라오는 놈은 버립니다. 그래서 아무도 범할 수 없는 사자가 되는 것입니다. 은혜란 이런 것입니다. 참새는 새끼들에게 절대 이런 걸 연습시키지 않습니다. 끝까지 안락한 둥지에서 키웁니다. 그래서 높은 창공을 비상하지 못합니다. 개는 새끼들을 절대 낭떠러지에 떨어뜨리지 않습니다. 끝까지 품에 안고 먹이고 핥아줍니다. 그래서 참새요, 그래서 개입니다. 우리가 어떻게 살고 자녀들을 어떻게 키우는 것이 은혜일까요?  하나님은 때때로 우리에게 비행 연습을 시킵니다. 우리의 편안한 상태를 방해하고 우리를 하나님의 날개위에 태웁니다. 독수리가 새끼들을 둥지에서 몰아내는 것은 그들을 추락시키기 위함이 아니라 다른 방법으로는 새끼들이 나는 법을 배울 수 없기 때문입니다. 사자가 새끼들을 낭떠러지에 떨어뜨리는 것은 죽이기 위해 그러는 것이 아니라 다른 방법으로는 새끼들이 사자가 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충분히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아는 것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날개를 펼치기 위해 우리의 안락은 방해 받아야 합니다. 우리가 안전한 둥지에서 광야학교로 밀려나는 것은 나는 법을 배우기 위해서입니다. 광야의 목마름이 그래서 갈구함이 그래서 날게 되는 것이 바로 믿음입니다.

           나는 열보다 아홉이 좋습니다. 아홉이란 어떤 수입니까? 두말할 필요도 없이 열보다 하나가 모자라는 수입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를 보태야 열이 되는 수, 그래서 늘 아쉬움을 느끼게 하는 수입니다. 그렇다고 정말 열보다 못한 수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끝없이 높고 너른 하늘을 십만리장천이라 하지 않고 구만리장천이라고 합니다. 젊은이들 보고는 ‘앞이 구만리 같다’고 합니다. 죽을 고비를 넘기고 살아난 것을 구사일생이라고 합니다. 우리나라에 문화재로 남아있는 탑들을 보면 구층탑은 부지기수로 많아도 십층 탑은 한 번도 본적이 없습니다.  열이란 수가 넘치지도 않고 모자라지도 않고, 또 조금도 여유가 없이 꽉 찬 수, 그래서 다음도 없고 다음 다음도 없이 아주 끝나버린 수라는 점에서, 아홉은 열보다 많고, 열보다 크고, 열보다 높고, 열보다 넓고, 열보다 멀고, 열보다 긴 수, 그래서 다음, 또는 그 다음, 미래의 꿈과 가능성의 수이기에 나는 아홉을 더 사랑합니다. 아홉 같은 사람이 더 그립습니다.  나 자신도 아홉수 사람입니다. 모든 일에 완벽하지 않습니다. 뭔가 부족하고 채워져야 할게 많은 사람입니다. 그래서 늘 목이 마릅니다. 그래서 더욱 하나님의 은혜가 없이는 살 수 없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오늘도 처절하게 날개를 펄럭이며 창공을 시도하고 있습니다. 김연아는 저리 가라할 정도로 수없이 엉덩방아를 찝니다. 그래도 나는 아홉이 좋습니다. 인생이란 무엇 한 가지도 완벽할 수가 없으며 항상 어딘가가 부족하고 어설픈 것이 오히려 정상적인 것입니다. 행여 무엇이 남들보다 모자란 것이 아닌가 싶어서 스스로 괴로워하고 외로워하고 서글펐다면, 어떨까요? 이제부터라도 열이란 수보다 아홉이란 수를 더 사랑해 보는 것이... 그래서 더 채워보려고 치열하게 끝까지 사는 것이... 사는 것이 곧 이기는 것입니다. 은혜란 그런 사람에게 부어지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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