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은 누구나 자기 이름을 가지고 삽니다. 아이가 태어나면 이름을 짓습니다. ‘작명’(作名)이라고 하지요. 한국의 관습은 가족 중에 큰 어른이 작명을 하던지, 아니면 사주(사람이 태어난 연월일시를 근거한 간지)를 근거로 작명소에서 이름을 짓기고 합니다. 요즘은 아이가 태어나기도 전에 엄마 뱃속에 있을 때부터 소위 ‘태명’(胎名)을 지어 부릅니다. 그리고 아이가 태어나면 부모는 이 아이에게 어떤 이름을 지어줄까를 고민합니다. 왜 고민할까요? 두 가지 이유에서일 겁니다. 첫째는 한 번 지어서 호적에 올라간 이름은 그 아이가 죽을 때까지 따라가기 때문이겠지요. 이름은 평생을 같이합니다. 그래서 아무 이름이나 지어줄 수가 없겠죠. 둘째는 아이에게 이름을 지을 때 부모는 그 아이의 이름에 의미를 담아 짓고자 합니다. 한마디로 아이를 향한 부모의 기대를 이름에 담습니다. 내 아들 딸이 이런 인생을 살아주었으면 좋겠다는 기대이겠지요. 저의 이름은 ‘동훈’(東勳)입니다. 한문풀이를 하면 ‘동’(東)은 ‘동쪽’이고, ‘훈’(勳)은 ‘공’을 세운다는 뜻으로, ‘동쪽에서 공을 세울 사람’이라는 뜻이겠지요. 아마도 나의 아버지가 저를 향한 염원을 담아 이렇게 지었으리라고 늘 생각하며 삽니다. 그 염원을 이루기 위해, 아버지가 지어 준 이름에 합당한 삶을 살기 위해, 한마디로 이름 값하기 위해 이 먼 동쪽까지 날아와 살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어쨌든 모든 사람들의 이름에는 ‘뜻’(의미)이 담겨져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저 사람은 이름 값하고 산다.’ ‘이름 값도 못 하네’ 이런 말이 나온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구약성경 ‘룻기’를 보면 하마터면 이름 값 못하고 살아 버릴 뻔 했던 두 여인이 다윗 왕이 태어나고, 예수님이 태어나셨던 동네, ‘베들레헴’을 찾아와서 자신들에게 주어진 이름 값 곧, 이름에 걸 맞는 생의 의미를 되찾은 이야기가 나옵니다. 한 여인의 이름은 시어머니인 ‘나오미’입니다. 이 이름의 뜻은 ‘희락, 기쁨’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 여인이 태어났을 때 그의 부모님들이 한 평생을 기쁨이 넘치는 삶을 살라고 이런 이름을 지어 주었겠지요. 그러나 그녀는 자기 고향 베들레헴으로 돌아오기까지 ‘기쁨’을 잃어버린 10년의 세월을 살았습니다. 나오미가 베들레헴으로 돌아오는 날, 그녀를 맞이하는 동네 사람들은 ‘이이가 나오미냐?’라고 하며 서로 수근 거렸습니다. 왜냐하면 행색이 너무나도 초라하고 버거운 인생살이에 찌든 모습으로 돌아왔기 때문입니다. 나오미는 고향 베들레헴을 떠나 먼 이방 땅 ‘모압’에서 10년을 사는 동안 남편과 두 아들을 잃고 생과부가 되어 돌아왔습니다. 자신을 아는 동네 사람들이 ‘저 여자가 우리가 아는 나오미 맞아?’라고 자신의 이름을 언급하자 나오미는 동네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나를 나오미라 하지 말고 마라라 하라! 내가 이런 거지꼴로 돌아왔는데 무슨 나오미.’ ‘마라’라는 이름의 뜻은 ‘쓰다’는 의미입니다. 원래 이름에 걸맞게 살지 못한 자신의 신세를 한탄하며 한 말입니다. 그런데 나오미는 베들레헴으로 돌아와 자신과 함께한 며느리인 모압 여인 ‘룻’이, ‘보아스’라는 베들레헴의 유력한 남자를 만나 결혼하여 ‘오벳’(다윗 왕의 할아버지)이라는 손주를 낳아 자신의 품에 안겨 주므로 비로소 다시 ‘기쁨’이라는 자신의 이름의 의미를 회복합니다.  또 한 여인은 이 시어머니 나오미의 며느리인 ‘룻’이라는 여인입니다. 이 여인은 이방인입니다. 모압 여인이죠. 나오미의 아들과 결혼했지만 남편이 죽으므로 시어머니와 함께 생과부가 되었습니다. 처지가 시어머니와 다를 바가 없습니다. 그런데 ‘죽는 일 외에는 어머니를 떠나지 않겠다.’고 하며 시어머니 따라 한 번도 살아보지 않은 땅, 베들레헴으로 왔습니다. ‘룻’이라는 이름의 뜻은 ‘친구’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방 여인인 그녀가 이방인은 지독히도 싫어하는 베들레헴의 유대인들 틈바구니 속에서 관연 자신의 이름에 걸 맞는 ‘친구’로 지낼 수 있을까요? 우려와는 달리 그녀는 베들레헴 사람들의 환영을 받습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베들레헴의 멋진 남자 ‘보아스’를 만나 결혼을 하고 아들 ‘오벳’을 낳습니다. 다윗 왕의 가문의 족보에 당당히 자신의 이름을 올립니다. 그것도 이방 여인의 이름으로 말입니다. 그리고 이 족보는 예수님의 족보이기도 하죠. 마태복음을 기록한 마태는 예수님의 족보를 언급하며 이방 여인 ‘룻’의 이름을 당당히 부릅니다. ‘살몬은 라합에게서 보아스를 낳고 보아스는 룻에게서 오벳을 낳고...’(마태복음 1:5) ‘룻’이라는 이름은 놀랍게도 성경이 불러주는 이름이 되었습니다. 결코 잊혀 질 수 없는 이름이 되었습니다. 이름의 뜻 그대로 하나님의 백성들과의 친구가 되었고, 메시야 가문의 친구가 되었습니다.

        제가 참 좋아하는 시 중에 ‘꽃’(김춘수)이라는 시가 있습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 /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준 것처럼 / 나의 이 빛깔과 향기에 알 맞는 / 누가 나의 이름을 불러다오. / 그에게로 가서 나도 그의 꽃이 되고 싶다. / 우리들은 모두 무엇이 되고 싶다. / 나는 너에게 너는 나에게 / 잊혀 지지 않는 하나의 의미가 되고 싶다.” 어쩌면 ‘이름 값 하고 산다.’는 말은 이 시 구절처럼 ‘잊혀 지지 않는 하나의 의미’로서의 이름을 회복한다는 말이 아닐까요? 탈무드에 보면 이름에 관한 이런 말이 있습니다. ‘사람은 세 가지 이름을 갖는다. 양친이 태어났을 때 붙여 주는 이름, 친구들이 우애의 정을 담아 부르는 이름, 그리고 자기 생애가 끝났을 때 획득하는 명성(名聲)의 세 가지이다.’ 구약 성경 전도서에도 이름에 관한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아름다운 이름이 보배로운 기름보다 낫고...’(전도서 7:1) 과연 어떤 이름이 ‘아름다운 이름’일까요? 이 땅에서 한평생을 살면서 서로에게 결코 잊혀 지지 않는 의미로서의 이름으로 기억 되며 살뿐만 아니라, 생이 끝난 후 천국에서 하나님이 불러 주시는 이름이 아닐까요? 예수 믿고 구원 받은 성도의 이름은 한낮 시시한 이름들이 아니라 적어도 하나님 나라 생명책에 기록된 이름들입니다. ‘나오미’와 ‘룻’이 예수님의 고향인 베들레헴에 돌아와 이름을 회복한 것처럼, 영적 ‘베들레헴’인 교회에 찾아 나와 주님 만나면 그 사람의 이름도 아무 의미 없이 세상에 묻혀버릴 이름이 아니라 하나님이 불러 주실 ‘아름다운 이름’들이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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