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근혜 전 대통령이 구속됐다. 검찰은 사상 최초로 현직 대통령을 피의자로 입건했고, 뒤이어 출범한 특별검사팀은 대통령의 수백억원대 뇌물수수죄를 추가했으며, 헌법재판소는 헌정사상 처음으로 대통령 ‘파면’을 선고했다. 그리고 파면당한지 3주만에 국가 최고 권력자에서 국정농단 주범으로 구속 수감되어 연녹색 수의를 입고 차디찬 감방에서 수형 생활을 시작했다. 박 전 대통령은 이제 “수인번호 503”으로 불리게 된다. 박 전 대통령 구속 수감을 지켜본 국민의 마음은 참담하다. 사태가 터진 이후에도 이 지경까지는 오지 않을 수 있는 기회가 여러 차례 있었으나 거듭되는 현실 오판으로 이를 모두 무산시켰다. 안타까운 일이다.

        1997년 대선 직전, 그는 오랜 은둔을 끝내고 화려하게 대중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1979년 아버지 박정희 전 대통령 암살을 당한 뒤 쓸쓸히 청와대를 떠났던 그는 이회창 당시 한나라당 대선 후보의 지지를 선언하면서 정치에 입문했다. 그는 1998년 대구 달성 보궐선거를 통해 금배지를 달았고, 같은 해 한나라당 부총재로 선출됐다. 그리고 2002년 한국미래연합을 창당해 9개월 동안 ‘외도’한 것을 제외하고는 언제나 보수정당의 중심에 서 있었다. ‘여당 내 야당’으로 강력한 리더십을 얻은 그는 2011년 12월, 선거관리위원회 디도스 공격 파문으로 홍준표 대표 체제가 붕괴되자 비상대책위원장으로 재등판한다. 박 전 대통령은 김종인·이상돈·이준석 등 외부 인사들을 영입해 외연 확장을 모색했고, 당명을 새누리당으로 바꿨다. 당헌에는 경제민주화와 복지를 추가했다. 이듬해인 2012년 4월 총선에서 과반 의석 확보에 성공하고, 12월 대선에서 득표율 51.7%로 문재인 민주통합당 후보를 꺾고 당선됐다. 그가 정계에서 화려한 이력을 이어갈 수 있었던 것은 박정희·육영수를 우러러 보는 회고적 보수층이 뿌리 깊게 존재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박 전 대통령은 취임 이후 무능과 아집이 합쳐진 국정 운영으로 지속적으로 민심을 잃었고 그 바탕 위에 최순실이란 불똥이 떨어지자 국민의 분노가 더해진 불길은 걷잡을 수 없게 되었다. 국민을 믿지 않고 최순실만 믿었던 그에게 국민들은 더이상 희망의 단어를 쓸 수 없게 되었다. 강부영 서울중앙지법 영장전담판사는 전날 구속 전 영장심사를 거쳐 이날 새벽 3시3분 “주요 혐의가 소명되고 증거인멸의 염려가 있어 구속의 사유와 필요성, 상당성이 인정된다”며 구속영장을 발부했다. 앞서 ‘박근혜ㆍ최순실 게이트’를 수사하는 서울중앙지검 특별수사본부는 그에 대해 삼성 뇌물 433억원 수수, 미르ㆍK스포츠재단 774억원 강제모금, 문화ㆍ예술계 블랙리스트 정책 지시 등 14가지 혐의로 사전구속영장을 청구했었다. 서울중앙지검 10층 임시 유치시설에서 대기하던 박 전 대통령은 20분간 신변을 정리한 뒤 서울구치소에 수감됐다. 탄핵 이후 박 전 대통령의 구속은 피할 수 없을 것이라는 예측이 지배적이었다. 무엇보다 그의 지시를 받은 사람들이 구속돼 재판을 받고 있어 형평성 문제가 제기될 수밖에 없었다.

        그의 추락은 자업자득의 측면이 크다. 최순실의 국정개입 의혹이 터지자 그는 “사익을 추구한 적 없다”거나 “선의였을 뿐”이라면서 무관함을 주장했다. 또, 뇌물죄 의혹이 불거지자 “엮어도 너무 엮었다”고 특검을 비난했다. 드러난 증거에 아랑곳하지 않고 무조건 혐의를 부인하고 검찰ㆍ특검의 소환조사에 불응하면서 오히려 ‘증거인멸 우려가 있다’는 의심을 샀고 결국 구속으로 이어졌다. 박 전 대통령은 명예를 지키기보다 거짓과 허언으로 나라와 국민을 우롱했다. 법조계의 한 인사는 “사태 초기에 깨끗이 책임을 인정하고 정치적 계산 없이 하야했다면, 최악의 결과는 없었을지도 모른다”고 했다. 하지만 박 전 대통령은 국민 앞에 서는 마지막 순간까지 제대로 된 사과를 하지 않았다. 검찰 출신의 한 변호사는 “아직도 자신이 한 행위가 왜 문제인지 모르는 것처럼 보였다”고 꼬집었다. 그를 대통령으로 뽑았던 국민의 상처와 배신감은 크고, 국가적 혼란은 여전히 진행형이다. 이로써 박 전 대통령은 헌정사상 첫 탄핵 대통령이라는 불명예에 전두환ㆍ노태우 전 대통령에 이어 재임 중 비리로 구속된 역대 세 번째 전직 대통령이라는 기록을 더하게 됐다. 대한민국 대통령의 결말은 충격적이다. 우리나라에서 실질적으로 대통령직을 수행한 9명 중 이미 하야 1명, 피살 1명, 구속 2명, 자살 1명이었다. 이 충격적 기록에 탄핵과 동시에 구속 1명이 보태졌다. 통계를 들자면 우리나라의 대통령 66%가 인간으로서 최악의 불행을 당했다. 불행을 모면한 3명도 말년에 만신창이가 됐다. 이 3명 중 2명도 박 전 대통령 경우처럼 재직 중에 문제가 불거져 조사받았으면 탄핵당했을 가능성이 있다. 결과적으로 한국 대통령들 가운데 누구도 비극을 비켜 가지 못했다. 위험한 직업으로 첫손가락에 꼽히는 게 소방관이다. 하지만 한국 대통령이 불행해질 확률은 소방관의 부상률보다 몇 배나 높다. 이 무섭고 험난한 운명의 한국 대통령 자리를 두고 오늘도 전쟁 같은 경쟁이 벌어지고 있다.

         국민들이 박 전 대통령을 용서할 수 없는 가장 큰 부분은 바로 거짓말이었다. 역사적으로 역대 대통령들은 계속해서 거짓말을 해왔다. 최근 한국의 한 일간지가 조사한 바에 의하면 가장 대표적인 대통령의 거짓말은 이승만 전 대통령이 1950년 6ㆍ25 전쟁 발발시 먼저 몰래 서울을 빠져 나가고도 온 국민을 속이고 ‘서울 사수’ 방송을 내보낸 것이었다. 그러나 그가 대통령직에서 물러난 것은 10년 뒤 3ㆍ15 부정선거 때문이었다. 박정희 전 대통령은 5ㆍ16쿠데타 뒤 “민간에 정권을 넘길 것”이라 약속해 놓고 끝내 정권을 쥐었다. 노태우 전 대통령은 87년 대선 당시 임기 2년 후 중간평가를 받겠다 했지만 지키지 않았고, 95년 5,000억원 비자금 조성 및 1,700억원 개인 축재 사실이 드러나기 직전까지 “부정한 돈은 받지 않았다”고 거짓말했다. 전두환 전 대통령 역시 “전 재산은 29만원뿐”이라며 재산 추징을 거부했지만 이후 지난해 7월까지 추징된 금액이 1,140억원에 달한다. 김영삼 전 대통령도 92년 대선 공약으로 “쌀 시장 개방은 대통령직을 걸고라도 막겠다”고 했지만 약속은 시행하지 않았다. 김대중 전 대통령은 86년 대선 불출마 선언, 92년 정계 은퇴 선언을 번복하고 끝내 대통령직에 올랐다. 하지만 박 전 대통령의 거짓말을 차원이 달랐다. 도덕성에 치명타를 입은 것이다. 민간인에 의한 국정농단을 해왔으며, 대국민담화까지 열어 적극적인 수사협조를 약속해놓고도 얼굴을 바꾼 점에 대해서는 ‘용서할 수 없다’는 응답이 80% 이상을 차지했다. 헌법재판소가 박 전 대통령에 대해 “헌법수호 의지가 없다”고 판단한 근거 중 하나도 박 전 대통령의 거짓 발언 때문이었다. 사회에 큰 혼란을 끼친데다, 반성이나 사과가 부족하고, 끝까지 진실규명을 방해했다는 것이다. 거짓말을 되풀이하는 정치인에 대해서는 유권자들이 표로 심판해야 한다. 또한, 박 전 대통령 탄핵과 구속으로 대한민국 대통령들의 비극 시대도 막을 내려야 한다. 오는 5월 9일 대통령 선거가 있고 다음 날 새 대통령이 취임한다. 세계에서 가장 위험한 자리를 오를 주인공이 누구일지 걱정이 앞선다. 대부분의 후보가 개헌을 약속했다. 개헌을 통해 제도적으로 권력을 분산하는 것 외에 대한민국의 정치 시스템을 바꿀 방법은 없을 것이다. 사탕 발린 공약은 충분히 들었다. 박 전 대통령의 결과를 교훈삼아, 제왕적 대통령 체제를 타파하고 미국의 방관, 일본의 오만, 중국의 보복, 북한의 불손을 이겨낼 대통령을 고르는데 대한국민의 온 힘이 집중되길 간절히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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