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말레이시아 정부가 달라 보인다. 그동안 한국인에게 말레이시아는 그다지 잘 살지 못하는, 동남아의 약소 국가라는 이미지였다. 지금도 세계에서 가장 높은 쌍둥이 건물이라는 타이틀을 유지하고 있는 88층짜리 ‘페트로나스 트윈 타워’ 정도가 떠오를 뿐이었다. 입헌군주제 이슬람국가인 점도 왠지 모를 거리감을 만들어 주었다. 하지만 북한 김정은의 이복형인 김정남 암살 사건이 터진 지 불과 3주 만에 우리는 말레이시아를 다시 보게 된다. 이번 사건과 관련한 말레이시아의 놀랄 만큼 냉철하고 단호한 대응 때문이다. 지난주 말레이시아는 김정남 암살 사건과 관련해 2009년 북한과 맺었던 비자 면제 협정을 전격 파기했으며, 급기야 정부는 강철 북한 대사를 기피인물(persona non grata)로 간주하며 추방하기로 결정내렸다. 비인도적이고 반문명적인 행위에 대해 정면으로 책임을 물은 것이다. 말레이시아 언론은 북한과 단교 카드까지 나올 수 있을 것으로 보고 있다.

        지난달 13일 오전 말레이시아 쿠알라룸푸르 공항에서 김정남이 암살된 이후 말레이시아 정부의 암살자와 그 배후를 밝혀내기 위한 노력은 예상외였다. 13일 오전 9시쯤 쿠알라룸푸르 공항에서 김정남은 여성 2명에게 피습당한 후 병원 이송 중 사망했다. 이튿날 말레이시아 경찰은 베트남 여권을 소지한 도안 티 흐엉이라는 여성을 체포했고 당일 쿠알라룸푸르 국립병원에서는 김정남 시신을 곧바로 부검했다. 그 다음날 인도네시아 국적의 시티 아이샤라는 여성도 체포했으며, 그 다음날에는 북한 국적의 용의자 리정철을 체포하기에 이르렀다. 그리고 그 다음날 말레이시아 경찰청은 북한 국적의 용의자 5명의 신원을 공개하면서 이 중 4명은 사건직후 자카르타행 항공기를 이용해 아랍에미리트의 두바이와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를 경유해 17일경 평양에 도착한 사실을 밝혀냈다. 또, 이번 사건에는 북한 대사관 직원을 포함해 북한이 암살 배후임을 공표했다. 말레이시아 범죄수사국은 김정남의 사인에 대해 조사하면서 1차 부검 후 심장마비의 증거도 없고 외상도 없다면서 곧바로 2차 부검을 실시했다. 이후 말레이시아 보건부는 사망원인을 독극물 VX 중독이라고 결론지었다. 이 과정에서 말레이시아는 잠시 북한과의 외교마찰을 두려워해서 명확한 사인을 밝히지 않고 있다는 오해를 사기도 했지만 범죄수사국은 이런 소문에 아랑곳하지 않고 좀더 명확한 사인을 밝히기 위해 총력을 기울였고 마침내 독극물에 의한 죽음으로 결론짓기에 이르렀다. 실제로 이 독극물은 할리우드 영화에 몇번 등장했다. 일단 VX에 노출되면 침이나 땀을 흘리다가 시간이 지나면 근육과 신체기관 작동이 멈추어 심장이 정지된다. 김정은은 이복형을 독살하는 데 서슴없이 현존 최악의 화학무기를 사용한 것이다. 그리고 지금 말레이시아는 암살에 눈이 멀어 말레이시아의 주권에 아랑곳하지 않은 북한을 응징하려고 한다.

         북한측은 명백한 증거들이 드러났음에도 불구하고 이 모든 수사과정을 한사코 부인했다. 북한측은 김정남이 화학무기로 인해 죽은 것이 아니라, 단순한 심장마비였고 말레이 경찰이 북한을 표적수사해서 북한의 이미지를 훼손하는 헛소문을 조장했다며 줄기차게 말레이 정부를 비난해왔다. 북측은 김정남이 피살되고 경찰 수사가 진행되자 부검부터 용의자 발표까지 모든 것을 문제삼았다. 그때마다 말레이시아는 수사결과를 하나씩 풀어놓으며 대응했다. 그리고 김정남의 사인을 확인할 만한 능력을 갖춘 전문가들이 있음을 강조하면서 단순한 심장마비로 죽었다고 주장하는 북한 대사의 말을 일축했다. 칼리드 경찰청장이 나서서 북한 대사관 직원 연루 사실을 공표함으로써 북측은 더욱더 궁지에 몰리게 되었지만, 북측의 저항은 그럴수록 더했다. 강철 북한 대사는 대사관 앞에서 북한 범행 일체를 부인하는 기자회견을 했다. 그러면서 김정남 시신을 인도해 달라는 종전 요구를 반복했다. 이에 말레이시아는 북한이 평양으로 도주한 용의자들이 쿠알라룸푸르 국제공항에서 김정남을 암살했는데도 수사에 협조하기는커녕 "말레이시아 경찰 수사 결과를 믿지 못하겠다"며 발뺌으로 일관해 온 것에 분노했다. 결국 말레이 정부는 북한 대사를 추방하기로 결정했다. 강철 대사 추방 결정 이유로 김정남 피살사건 관련 강철 대사의 사과를 요구했으나 이를 받지 못했고, 향후에도 받지 못할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결국 강철 북한 대사는 지난 주말 추방되어 베이징을 거쳐 평양에 도착했다.
우리는 말레이 정부의 수사가 식상한 절차를 거쳐 대충 넘어갈 것이라고 예상했다. 하지만 말레이 정부의 조치는 놀랄 만큼 단호했다. 오히려 나날이 강경해지고 있다. 말레이의 최근 모습은 북한에 매번 당하고도 큰소리 한번 치지 못하는 대한민국의 모습과는 사뭇 다르다. 자국의 대표적인 공항에서 테러를 저지른 북한에 대해 용서하지 않겠다는 각오로 이번 사건을 해결하고 있는 모습에서 자국 국민의 안전을 생각하는 정부의 바른 모습도 얼핏 보인다. 또한 다른 국가의 눈치를 보지 않고 자국의 검찰, 경찰, 수사국들의 정확성에 자신감을 나타내는 모습 또한 대한민국보다 한 수 위였다. 대한민국과의 관계에서는 늘 칼자루를 잡고 있던 북한이었지만, 이번 사태에서는 말레이시아가 칼자루를 잡았다. 북한이 끝까지 '오리발'을 내밀며 말레이시아를 비난한다면 '단교 카드'가 나올 수도 있다. 북은 이번에도 '없다' '아니다'는 거짓말과 강변으로 이 위기만을 넘기려 하고 있다. 실제 지금까지는 이런 수법이 통했다. 그러나 이번에는 통하지 않을 듯하다.

        김정남 암살의 여파로 말레이와 무비자 협정이 8년 만에 파기됨에 따라 북한은 동남아 공작과 외화벌이에서 상당한 타격을 입게 됐다. 그동안 북한은 아시아에서 유일하게 맺고 있는 '무비자 협정'을 악용해 공작원과 해커 등을 말레이시아에 수시로 파견해 각종 불법 행위를 일삼은 것으로 알려졌다. 최근 공개된 유엔 북한제재위원회 전문가 패널의 보고서를 보면, 2016년 7월 말레이시아에 있는 북한 위장 기업이 중국에서 아프리카로 군사용 통신 기기를 수출했다. 이 회사는 북한 대남공작 기구인 정찰총국이 운영하는 회사라고 한다. 북한 대사관 또한 북한 해외 공작소로 짐작되어진다. 말레이시아가 처음 각인된 것은 1997년 아시아 외환위기 때일 것이다. 당시 한국은 국제 투기자본의 공격에 국제통화기금(IMF)에 백기투항했다. 우리는 고금리 등 주권 침해적 해법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말레이시아의 해법은 정반대였다. 외환시장을 걸어 잠그는 극약 처방으로 통화가치를 극적으로 방어해냈다. 어떤 해법이 옳았는지에 대한 논란은 진행형이지만 선진국들이 짜놓은 국제 금융질서에 도전한 용기는 적잖은 박수를 받았다. 이번에도 비슷하다. “어떤 나라의 장기 말도 되지 않을 것”이라는 말레이시아의 당당함에 세계인들의 호응이 뜨겁다. 말레이시아 경찰청장의 단호함도 화젯거리이다. 한 기자가 김정남의 아들 김한솔 의 말레이시아 입국설을 질문하자 ‘제발 루머를 퍼뜨리는 사람이 되지 말라’는 면박을 줬고 루머는 단번에 종식됐다. 말레이시아의 북한 다루기에서는 본질을 파고드는 집요함이 발견된다. 동시에 우리의 품격에 대해 자문하게 된다. 천안함, 연평도 연평해전, 금강산관광 등에서 봐온 우리 정부의 물러터진 대응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저자세 외교는 이제 그만해야 한다. 말레이시아의 단호한 외교 대응을 보고 배울 것은 배워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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