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에서 국문학자로 유명할 뿐 아니라 문화공보부 장관까지 지냈던 이어령씨의 수필집에 “수의 비극”이라는 글이 있다. 그는 어려서부터 동네 어른들에게 수를 세는 법을 배우게 되었다. 만나는 어른들마다 그에게 이렇게 물었다. “너 몇 살이냐?” “형제는 몇이지?” “네 식구는 몇 명이냐?” “너의 집은 몇 번지지?” 이러한 어른들의 질문에 막힘 없이 대답을 잘하면 똑똑하다고 칭찬을 들었다. 그래서인지 그는 숫자 세기를 좋아했다. 방안에 누우면 천장에 그려진 무늬를 세고, 병풍을 보면 그곳에 그려진 꽃이 몇 개인지, 사슴이 몇 마리인지, 사람이 몇 명이나 되는지를 세었다. 그 그림이 얼마나 아름다운지는 아랑곳 하지도 않았다. 누가 그린 것인지도 관심이 없었다. 한 번은 그의 어머니가 형과 함께 별 사탕을 나누어주었는데 둘이서 그것을 세어보고는 똑같지 않다고 싸우게 되었다. 동생은 형보다 별 사탕 수가 적으니까 더 달라고 대들었고, 형은 동생보다 더 크니까 더 먹어야 한다고 싸웠다. 결국 두 형제는 밤중에 집에서 쫓겨나게 되었다. 분한 마음에 그는 동네 언덕에 올라가서 누웠다. 다른 때 같으면 하늘의 별 들을 하나 둘 세었을 텐데 그 날은 별을 셀 마음이 아니었다. 날은 춥고 무서워지면서 수를 세는 것이 얼마나 바보인지를 깨달은 것이다. 이어령씨는 그 수필의 끝에 이런 기도를 하면서 끝을 맺고 있다.

주여, 노동과 사랑과 웃음을 숫자로 환산하는 자들을 구원해주소서.
누구보다 한 살을, 하루를, 한 시간을 더 많이 살았다고
기뻐하지 않게 하시고,
누구보다 천 원을, 백 원을,
십 원을 더 벌었다고
자랑하는 일이 없도록,
주여 나에게 용기를 주소서


        이 글은 숫자에 사로잡혀 있는 인간의 비극을 말하려는 것이다. 여기서 숫자는 곧 좁은 아집과 편견을 의미한다. 눈에 보이는 평가기준으로 보이지 않는 것까지도 판단하기가 아주 쉽다.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나사렛 출신이라고 무시했다. 빌립이 나다나엘에게 예수님을 소개할 때 그가 한 말은 유대인들이 당시 나사렛을 어떻게 보고 있었는지를 알려주고 있다.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느냐?” 나사렛은 이스라엘 북쪽에 위치한 아주 작은 시골이요, 천민들이 사는 곳이다. 더구나 예루살렘에서 가장 멀리 떨어진 변방 도시이다. 당시 하나님의 성전이 있던 예루살렘에서 가장 멀리 떨어진 곳은 하나님의 은혜를 가장 받지 못하는 지역으로 알고 있었다. 나사렛에서는 인물이 나지 않는다는 말이 당시 사람들 사이에 공공연하게 전해지고 있었다. 그 지역에서 예수님이 어울렸던 사람들 역시 모두 어부요, 세리요, 창녀들이었다. 사회의 지도자나 명망가는 한 사람도 없었다. 바울처럼 당대 최고의 학문가인 가말리엘에서 공부를 한 것도 아니었다. 예수님에게는 내 세울만한 학식이 있지 않았다. 돈이 많았던 것도 아니다. 하루 먹을 양식조차도 없었다. 잠 잘 곳이 마땅한 것도 아니었다. 예수님의 외모는 어떠했을까?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그림이나 사진에 나와 있는 예수님의 모습에 익숙하다. 그래서 코도 오뚝하고 눈은 시원시원하고 얼굴은 가늘면서 따뜻한 모습이 예수님일 것이라고 생각한다. 지금까지 나온 영화에서 예수님의 역할을 했던 배우는 한결같이 미남이요, 멋있는 사람이었다. 그래서 예수님도 그와 비슷했을 것이라는 인상을 받고 있다. 물론 예수님의 사진이 남아있는 것은 아니다. 정확하게 어떤 얼굴을 하고 계신 분인지 알 수가 없다. 그러나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시기 7백년 전에 살았던 이사야 선지자는 예수님의 외모를 아주 볼품없이 그리고 있다. 그는 마른 땅에서 나온 줄기처럼 힘이 없어 보이고 건드리면 곧 쓰러질 것 같은 분으로 묘사하고 있다. 아름다운 모습하고는 아주 거리가 먼 것이다. 그렇다고 풍채가 좋은 것도 아니었다. 우리가 감탄할 만한 어떤 모양도 갖고 있지 못했다. 그래서 사람들은 예수님을 무시하고 멸시할 것이라고 예언을 한 것이다.

         그러나 눈에 보이는 판단은 아주 잘못된 것이었다. 하나도 맞지 않았다. 예수님은 온 세상을 창조하신 하나님이셨다. 우리를 죄와 사망에서 구원하실 구원주이셨다. 많은 재산을 가지고 나가 방탕하다가 돌아온 아들을 품에 안고 흐느끼시는 사랑의 주님이셨다. 그 분의 손은 아주 거칠어 보였지만 그 손에 한 번만 닿기라도 하면 중풍병자가 낫고 소경이 눈을 떴으며, 죽은 자가 살아났다. 그 분을 따라다니던 제자들 역시 겉으로는 아주 형편없이 보이는 사람들이었다. 대부분의 제자들이 갈릴리 호수에서 고기를 잡아 하루하루 살아가는 사람들이었다. 그 중 몇몇은 유대인들이 증오했던 세리 출신이었다. 그러나 주님이 그들의 영혼을 풍성하게 하니 온 세상에 소망과 꿈을 주는 사람들로 바뀌었다. 눈에 보이는 대로 판단하는 것, 숫자를 보고 판단하는 것 어떤 것도 정확하지 않다. 어느 왕이 화가들에게 가장 아름다운 그림을 구해오라는 명령을 내렸다. 또한 가장 아름다운 그림으로 선정이 된 작품을 가져온 사람에게는 큰 상을 내리겠다고 했다. 화가들은 가장 아름다운 최고의 작품을 나름대로 찾아서 왕에게 가져갔다. 우열을 가리기 힘들 정도로 작품의 가치들이 뛰어났다. 하지만 어느 노인의 초상화를 가지고 온 화가가 있었다. 그런데 그 초상화는 누가 보아도 혐오스러울 정도로 얼굴에 심한 화상을 입고 있었다. 그림을 본 왕은 화가 머리 끝까지 치밀었다. 당장 화가를 불러 큰 벌을 주려고 했다. 왕에게 끌려온 화가에게 왕이 물었다. “자네는 이걸 가장 아름다운 그림이라고 가져왔는가? 진정 왕을 능멸한 생각인가?” 그때 화가가 이런 말을 했다. “왕이시여, 절대 왕을 능멸할 마음으로 이 그림을 가져온 것이 아닙니다. 저에게는 이 초상화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그림입니다. 이 초상화의 주인공은 바로 저의 아버님이십니다. 제가 어렸을 때 집에 큰 화재가 일어났습니다. 아버님을 저를 구하시기 위해 불길로 뛰어 들으셨다가 저를 구하고는 이런 화상을 입게 된 것입니다. 이 세상에 이 그림보다 더 아름다운 작품은 없습니다.” 왕은 그의 말에 너무 큰 감동을 받았다. 결국 그 그림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그림으로 선정이 된 것이다.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니다. 큰 숫자가 항상 좋은 것이 아니다. 세상을 아름답게 만들려면 보이지 않는 것을 볼 수 있는 지혜로운 마음이 있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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