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주요 언론사에서 승진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물론 어느 나라든 주요 언론사에서의 승진은 쉬운 일이 아닐 것이다. 필자가 한국에서 처음으로 뉴스 편성팀에서 일할 때였다. 당연히 직책은 기자로 불릴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보도국으로 부서를 옮길 때까지 내게는 ‘작가(Writer)’라는 직책이 주어졌다. 기자와 작가는 엄연하게 구분되는 것이기에 같이 사용할 수 없다는 게 이유였다. 그 사무실에서 기자는 현장에서 보도를 우선으로, 작가는 사무실 내에서 방송분량을 걸러 매끄럽게 하는 작업이 우선시되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필자는 약 10개월정도 작가로 새겨진 명함을 들고 다녀야 했다. 일의 업무상 겹치는 일이 더러 있었지만 전문성을 구분해야 된다는 게 선배들의 설명이었다. 그리고 신문사에서는 일반사원인 기자로 10년 정도 일을 해야만 겨우 ‘차장’이라는 직책을 얻을 수 있는 연륜이 된다. 부장이나 부국장, 국장은 15년에서 20년정도의 언론사 짬밥이 있어야만 오를 수 있는 자리였다. 그래서 이들은 오랜 세월 쌓아온 경험과 노련미로 책상에 앉아 모든 기사와 기사 배치까지, 뉴스의 전 제작과정을 진두지휘하는 파워를 가지게 되어 우린 이들을 데스크라고 부르기도 한다. 이 급들은 파워도 가지지만 동시에 막중한 책임감도 가지게 된다. 필자는 이런 대략적인 언론사의 분위기에 익숙해져있던 중 미국으로 오게 되었다.

        14년전 미주 한국일보사에 경력사원으로 응시를 했었다. 그런데 한국일보사측은 한국에서의 5년이라는 필자의 경력이 미국 언론사에서 인정받기 힘들고, 하는 일과 담당 분야가 다를 수 있다며 당분간은 일반 사원인 기자로 활동할 것을 제안해, 월급도 그 수준으로 책정되었다. 그렇게 합의하에 덴버지사로 오게 되었는데 이해가 안되는 일들이 종종 생겼다. 덴버지사로 발령받은 직후 콜로라도의 언론사에서 근무하는 사람들이 모여 저녁을 함께 먹은 적이 있었다. 그런데 필자를 제외하고 참석한 모든 사람들의 직책은 국장급과 사장이었다. 언론에 관련된 전문지식도 없고, 경력도 그리 많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회사마다 국장이라는 타이틀이 난무하고 있었다. 사장이 직원을 겸한 유일한 회사 멤버인 경우도 있었다. 이렇게 대단하신 인물들이 범람하는 식사 자리에 끼어 밥을 먹으며, 승진을 위해 한국에서 어렵게 가시밭길을 걸어왔고 지금도 걸어가고 있는 언론사 선배들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때 처음으로 직위의 가벼움을 깨달았다. 직원이 달랑 두 세명 밖에 없기 때문일 수도 있겠지만 일반 기자라든지, 광고 직원이나 혹은 팀장 정도가 어울리는 수준임에도 불구하고 한국에서는 정말 얻기 힘든 직책들이 남발되고 있었다. 아마도 보여지고 불려지고 알려지고 싶은 마치 자신이 출세라도 한 양 겉멋에 치중한 결과일 것이다. 또, 당시 갓 이민온 필자로서는 한인사회에 회장이라는 타이틀도 이렇게 많을 줄 미처 몰랐었다.   때문에 그 책임감도 가벼울 수 밖에 없었던 것이 아닐까.
 
         ‘이래 봬도 우리는 뼈대 있는 집안이다’, ‘이 묘는 조선시대 고위관료였던 조상님의 것이다’, ‘아들아, 대통령이 되어라, 그래도 나라의 녹을 먹는 것이 좋다’. 누구나 어릴 적에 이런 말을 집안 어른들로부터 들어본 적이 있을 것이다. 뭐라도 한자리 해야만 된다는 얘기다. 이 출세욕이 나쁜것 만은 아니다. 출세욕이야 말로 지금의 한국을 만든 원동력이었고, 지금의 한인사회가 발전할 수 있는 기반이었다. 그러면 왜 우리는 지금에 와서 출세욕에 대해 부정적으로 생각하는 것일까. 직함만 갖고 수장(首長)으로서의 무게를 느끼지 못했기 때문이다. 세상을 바꿀 수 있는 가장 강력한 수단은 정치이다. 그렇기 때문에 예로부터 정계에 진출하면 출세를 한 것이라 생각해 자손들이 장원급제를 하길 바랬고, 반대세력은 어떠한 대가를 치르더라도 과감히 제거했었다. 이런 성향은 이민사회에서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한국 정계에 이름 한자 올리고 싶어하는 사람들과 이민사회에서 단체장을 하고 싶어하는 사람들의 심리를 비슷한 맥락으로 풀이할 수 있다. 감투라도 하나 가지고 있어야 커피 한 잔이라도 얻어 마시고, 사람들이 자신에게 굽신거린다는 생각부터 비슷하다. 그리고 반대세력을 향해서는 무슨 대단한 권력이라도 가진 양 거들먹거리고 편나누기를 이끌기도 한다. 그러다 보니 지난 13년 동안 필자는 직함에만 연연해하며, 자신이 공인임을 망각하고 단체장의 자리를 한낱 개인의 욕심을 채우는 자리로 전락시키는 수장들도 여럿 봤다.

        올해는 덴버지역을 비롯해 콜로라도 스프링스까지 3개의 콜로라도 소재 한인회가 모두 새 회장을 선출하는 해이다. 때가 되면 공개적으로 한인 회장을 선출한다는 공고가 나가기는 하지만, 암암리에 기존의 한인회를 차지하고 있던 인사들을 중심으로 담합해 측근의 인물을 천거하거나 한인회장으로 선출시켜 온 것은 이제 콜로라도 한인사회의 오랜 관례가 되어 버렸다. 회장할 사람이 없다고 연임하는 것 역시 의례적인 일이다. 하지만 현 집행부와 회장단이 사심으로 협회를 생각했기 때문에 쭉 연임하는‘장수’ 회장이 나올 수 있었던 것이 아닐까. 한인 단체는 봉사가 우선이지 비즈니스가 아니다. 친인척 혹은 지인으로 세습되거나 독재가 되어서도 안된다. 회장을 포함한 집행부는 2년, 최대 4년까지 봉사하고 조용히 물러나야하는 것이 당연한 수순이며, 혹여 한인 사회에서 그들의 이전 경험이 필요하다면 고문으로서 조언 정도만 해주면 된다. 한인회 뿐만이 아니다. 어느 단체든 그것이 사적이든, 종교적이든 상관없이 모임의 수장 타이틀을 가지고 있다면 그는 공인이며, 그 자리에 서있는 자신의 격을 다시 한번 성찰할 수 있어야 한다. 잘못된 것이 있으면 응당 내 탓으로 반성하고, 주변을 돌아보는 최소한의 마음가짐조차 없다면 수장의 자격이 없다. 또한 회장들은 의미없는 갈등과 반목을 일으키는 이들보다는 화합과 타협을 통해 한인사회의 번영을 도모하는 이들로 집행부를 꾸리는 일 또한 중요하다. 얼마전에 진행되었던 전 교민을 대상으로 한 한인회의 노래자랑은 심사 기준에 대한 논란에 이어, 주최측 관련 교회 사람들에게 상금을 몰아 주고, 그 행사에서 모아진 성금 또한 주최측의 주변인에게 나눠준 것에 대해 이곳저곳에서 불만의 목소리가 들린다. 이제는 지금까지 횡행되어 왔던 ‘끼리끼리’의 행태에서 벗어나 범동포적인 기획을 실행하고 결과를 이끌어낼 수 있는 안목있는 집행부의 탄생이 요구되어진다. 더불어 올해는 체육회, 상공인회, 노우회 등 10여년동안 이름만 걸어온 유령 단체들이 사라지고, 콜로라도의 새로운 단체장들이 탄생하여 덴버 이민사회에 활기를 불어넣어 주기를 기대한다. 미주 한인사회에서 한인회 다음으로 활발한 활동을 하고 있는 단체가 재미 대한 체육회이지만 콜로라도에서는 그 의미를 상실한지 오래다. 국가들이 단결해 응원하는 모습을 보면 스포츠의 힘이 얼마나 대단한지 알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구심적 역할을 해야 할 단체가 없다. 차라리 단체의 이름이 없어지면 한인 사회의 숨어있는 리더들이 새로 만들기라도 할텐데 말이다. 이제 더 이상 콜로라도 젊은 세대들을 케케묵은 회칙으로 묶어두고 나이나 들먹이며 대외적으로 망신 당하는 협회는 사라질 때가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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