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과 수위는 높아졌지만 의혹 해소는 겉돌았다. 박 대통령의 4일 대국민담화다. 박 대통령은 이날 “모든 사태는 모두 저의 잘못이고 저의 불찰로 일어난 일”, “저의 큰 책임을 가슴깊이 통감하고 있다”, “필요하다면 저 역시 검찰의 조사에 성실하게 임할 각오이며 특별검사에 의한 수사까지도 수용하겠다”며 고개를 숙였다. 국민 앞에 직접 서는 것에도, 잘못을 인정하는 것에도 인색했던 박 대통령이 두번의 대국민담화를 통해 최순실의 국정개입을 여러 차례 사과를 했다는 점은 그만큼 절박해졌다는 뜻일게다. 그러나 박 대통령의 간곡한 수사 의지도, 몇 차례의 울먹임도 ‘절반의 사과’라는 혹평을 받은 것은 사과의 핵심인 책임 인정과 의혹 해소가 빠졌기 때문이다. 최씨가 얼마나 국정에 개입했는지, 그리고 최씨를 비선실세 노릇을 하도록 내버려둔 이유가 무엇인지도 솔직하게 설명하지 않았다. 홀로 살면서 챙겨야 할 여러 개인사를 도와줄 사람조차 마땅치 않아서 최씨로부터 도움을 받고 왕래하게 됐다며 자신의 외로운 처지를 강조한 감정적 해명만 했을 뿐이다. 사실 온 나라를 쑥대밭으로 만든 이 최순실 게이트는 박대통령이 공과 사를 구분하지 못한 것이 발단이다. 현재 지난주 박근혜 대통령의 지지율은 ‘비선 최순실’의 국정농단 사태로 인해 역대 대통령들 가운데 최저치인 5%로 떨어졌다. 이같은 지지율은 사실상 국민이 대통령에 대한 ‘정치적 탄핵’을 선언한 것이란 지적이 나올 정도다. 최순실 사태에 대한 국민적 공분이 너무 크기 때문에 콘크리트 지지층마저 등을 돌렸다. 미주 한인사회도 깊은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후진국형 권력 비리가 선진국 진입을 코앞에 둔 대한민국에서 일어났다는 사실에 한인들은 망연자실하고 있다. 필자가 만난 이들 대부분이 “부끄럽다”, “화가 난다”는 반응이었다. 온라인에서는 ‘박 대통령의 하야를 촉구하는 50개국 재외동포 일동’이라는 명의의 시국성명서가 공개됐다. 이들은 대통령이라는 사람이 한 개인의 꼭두각시 놀음에 빠져 있었던 사실에 공분했다. 특히 해외 언론들이 최순실 게이트를 보도하기 시작하면서 해외에 살고 있는 우리는 더욱 참담함을 느낀다. 북한 관영매체까지도 최순실 비선 국정농단에 대해 상세히 전했다. 북한은 박근혜 정권의 거대한 부정부패 세력을 강조하며, 남한 도처에 30만여명의 군중이 촛불 투쟁 중이라고 보도했다.

       드디어 여당내에서도 박 대통령을 버리는 것에 동참했다. 새누리당 비박계 김무성 의원이 7일 박근혜 대통령의 새누리당 탈당을 공식 요구했다. 여당 대표 출신이 여당 소속 대통령의 탈당을 요구함에 따라 여권내부도 격랑 속으로 빠져들고 있다. 김 의원은 긴급 기자회견을 통해 박 대통령은 선당후사의 정신으로 당적을 버려야 한다며 박 대통령을 공격했다. 또 최순실 국정개입 사태와 관련해 “국민이 위임한 대통령직이라는 공적 권력이 최순실 일가가 국정을 농단하고 부당한 사익을 추구하는 데 사용됐다. 헌법의 최종 수호자인 대통령이 헌법을 훼손하며 국정을 운영했다”고 비난했다. 그리고 국민과 여야가 정치적으로 합의하여 거국중립내각 구성으로 국정의 공백을 최소화 하는 것이 현 상황에서 가장 좋은 대안임을 강조했다.  여당 의원들 뿐만 아니라 최씨의 국정 농단사건과 관련해 주요 관련 인사들이“박근혜 대통령이 지시한 것”이라고 최종 책임을 대통령에게 돌리는 진술이 잇따라 나오면서 박 대통령의 입장은 더욱 힘들어졌다. 안종범 전 청와대 정책조정수석은 검찰에서 “미르·K스포츠재단 설립은 박 대통령의 지시에 따른 것”이라며 “모금 상황을 수시로 보고했다”고 진술했다. 야당 내에서도 정치적으로 해결할 상황을 넘어섰음을 이미 알고 있다. 이유는 거대한 민심의 흐름을 더이상 외면할 수 없기 때문이다. 더불어 민주당과 국민의당 그리고 새누리당의 비박계까지 광화문에서 열린 대규모 촛불시위의 결과를 보고 이제는 정권 퇴진을 요구하는 민심을 외면할 수 없게 됐음을 깨달았다. 지난 주말 광화문에서는 대통령의 퇴진과 하야를 요구하는 촛불시위에 20만 인파가 모였고, 분노한 민심은 앞으로도 들불처럼 번져나갈 것이다. 친박계 지도부들도 더이상 버티면 물러날 타이밍조차 놓치게 될 것이다.

          구속된 정호성 전 부속비서관은 대통령 연설문 등 청와대 기밀문서를 최순실씨에게 전달했다는 혐의를 받고 있다. 그는 매일같이 30㎝ 두께의 청와대 자료를 최씨에게 들고 갔다. 이재만 전 총무비서관은 원래 청와대 인사위원회 멤버가 아닌데도 인사위에 참여해 좌지우지했다. 제2부속비서관에서 국정홍보비서관으로 옮겼던 안봉근씨는 필요 이상으로 나서며 장차관들과 대통령의 접촉을 가로막았다. 이 3인방에 막혀서 청와대 비서실장들, 수석들이 제 역할을 할 수 없었다는 것은 공공연한 비밀이었다. 박 대통령을 만날 수 없는 장관들과 청와대 참모들은 이들과 긴밀한 관계를 만들려고 했다. 허수아비 장관들은 이들의 눈치만 봤다. 이런 게 호가호위(狐假虎威)다. 국정이 제대로 될 리가 없다. 많은 사람들이 이 문고리 3인방으로 대표되는 ‘측근 정치’의 문제점을 지속적으로 경고해왔다. 2년 전 청와대 문건 유출로 ‘십상시(十常侍) 사건’이 났을 때도 이들을 교체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왔지만 박 대통령은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오히려 신뢰감을 표시했다. 최순실과 문고리 3인방은 결국 한통속이다. 그래서 최순실은 자기 멋대로 국가 예산을 주무르고, 장관들을 호령하며, 국내 재벌들로부터 1000억원을 목표로 돈을 뜯어냈으며, 딸아이 비리입학에, 식구들 재산불리기, 대통령 해외순방 광고기획에 평창 올림픽을 포함한 국가 사업들까지 속속들이 추진해올 수 있었다. 그녀의 비리는 자고 일어나면 하나씩 새로운 것들이 들춰지고 있다. 여기에는 꼭 청와대 관련자들이 붙어있다. 결국 박 대통령은 그들을 비호하고 그들에게만 의존하다가 중·고교생들로부터도 퇴진 요구를 받는 처지가 되고 말았다.

         사태가 사태인만큼 전국적으로 시국선언과 촛불집회가 봇물을 이룰 것으로 보인다. 이 촛불집회는 2002년 6월 주한미군의 장갑차량에 깔려 숨진 두 여학생의 사인 규명과 추모를 위해 광화문 앞에서 열린 것이 최초였다. 그리고 2004년 노무현 대통령 탄핵반대 집회, 2008년 미국산 쇠고기 수입반대 집회, 2014년 세월호 참사 추모 집회가 이어졌다. 촛불집회에서 촛불은 자신의 몸을 불살라 주위를 밝게 비춘다는 점에서 희생을, 약한 바람에 꺼지면서도 여럿이 모이면 온 세상을 채운다는 점에서 결집을, 어둠 속에서도 빛을 잃지 않고 새벽을 기다리는 불꽃이라는 점에서 꿈과 기원을 의미한다. 촛불집회가 문화제 성격을 띠게 된 데는 현행법에 저촉되지 않기 위한 이유가 가장 크다. 현행 ‘집회 및 시위에 관한 법률’에서는 해가 진 이후에는 옥외집회나 시위를 금지하고 있으나, 문화행사 등은 예외로 인정되기 때문이다. 이 집회는 주도세력 없이 자발적 개인모임이라는 것이 가장 큰 특징이다. 그런데 지금까지 촛불집회에 대한 집권층의 생각이 그랬듯이 반정부 세력의 선동이 의심되어 왔다. 하지만 이번 집회만은 순수하게 참여하는 사람들이 대다수일 것이다. 사실 최순실 게이트처럼 한 사건만으로 이렇게까지 여론의 흡입력이 작용한 사례는 드물다. 지금의 성난 민심은 촛불의 강으로도 표현하기가 부족할 정도이다. 언제까지 이어질지는 모르겠지만, 오늘도 광화문에서는 촛불집회라는 슬픈 노래가 들려온다. 여야 국회의원들도 박 대통령의 완전한 사과와 특단의 조치 없이는 이번 사태 만큼은 당해낼 재간이 없어보인다. 민심을 헤아리지 않는 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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