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주변에서 “지쳤다. 피곤하다”는 소리를 많이 듣는다. 우리 자신도 입버릇처럼 던지는 말이 있다. “이제 힘들어서 더는 못하겠다. 그만 두고 싶다.” 우리는 종종 ‘burn out’이라는 말도 많이 쓴다. 우리 말로 ‘탈진’이라는 뜻이다. ‘탈진’은 한 가지 일에 몰두하다가 어느 순간 자신이 하던 일에 회의를 느끼는 현상이다. 갑자기 무력감에 빠진다. 몸과 마음에 에너지가 하나도 남아 있지 않는 상태이다. 더 이상 태울 연료가 없기 때문이다. 이런 현상은 너무 일이 많을 때도 올 수 있다. 육체적 정신적 피로가 쌓여있을 때도 나타날 수 있다. 내가 원했던 것만큼 결과가 나타나지 않을 때 찾아오기도 한다.  ‘탈진’이 심해지면 ‘depression’이 된다. 이것은 침체 혹은 우울증으로 표현할 수 있는 말이다. 피곤이 겹치면 탈진이 된다. 탈진이 해결이 안되고 지속되면 그것은 우울증으로 바뀌기 쉽다. 우울증은 모든 일에 흥미를 잃어버리는 증상이다. 지금 하고 있는 일에 집중하지를 못한다. 정신이 산만해진다. 의욕도 기쁨도 없다. 밤잠을 잘 자지 못한다. 그러기에 늘 피곤이 풀리지 않는 것이다. 쉬고 싶어도 쉬지를 못한다. 급격하게 살이 찌기도 하고 살이 빠지기도 한다. 심지어 자살 충동을 종종 느끼게 된다.

          성경에도 이런 탈진을 경험한 사람들이 많이 나온다. 의인이었던 노아에게도 탈진이 왔다. 그러기에 아들들에게 범죄의 빌미를 만들어주었던 것이다. 모세도 여러 번에 걸쳐서 탈진을 경험하게 된다. 백성들을 혼자 인도하다가 그만 주저 앉고 만다. 백성들의 불평과 원망을 듣는 것에 너무 지쳐서 더 이상은 못하겠다고 소리를 지르기도 한다. 물을 달라하는 백성들에게 분노를 일으켜서 하나님 말씀에 불순종하기도 한다. 이 모든 것이 탈진에서 온 것이다. 성경에 탈진에 대한 아주 상세한 기록은 바로 엘리야의 탈진이다. 엘리야가 경험했던 탈진은 먼저 두 가지 이유에서 왔다. 첫 번째는 잘못된 시각때문이다. 갈멜산은 대 역사의 현장이었다. 하늘에서 불이 내려왔다. 준비한 제물을 다 태웠고 도랑의 물까지도 깨끗하게 말려버렸다. 바알과 아세라 선지자 850명을 물리친 것이다. 갈멜산의 기적의 역사는 그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엘리야는 갈멜산 꼭대기로 올라갔다. 그곳에서 비를 오게 해달라는 간절한 기도를 한다. 하나님은 그 기도를 응답하셨다. 3년 6개월 동안 비 한 방울도 오지 않던 이스라엘 전역에 장대비가 쏟아졌다. 백성들은 서로 얼싸안고 춤을 추었다. 그런데 그날 저녁 그 이야기를 들은 왕비 이세벨이 펄쩍펄쩍 뛴다. 당장 엘리야를 죽이겠다고 서슬이 퍼래졌다. 사람을 엘리야에게 보냈다. “내일 이맘때 반드시 너를 죽여서 바알 선지자들과 같이 만들어 주겠다. 만약 내가 그렇게 하지 않으면 신들이 내게 벌을 내릴 것이다” 이 말을 듣자마자 엘리야는 전혀 다른 사람이 된다. 갑자기 도망을 치기 시작한다. 브엘세바라는 곳으로 간다. 갈멜산에서 브엘세바까지는 150마일 정도된다. 남 유다는 이세벨의 힘이 미치지 못하는 곳이다. 얼마나 달린 것인지 모른다. 그것도 모자라 사환을 브엘세바에 남겨두고 자기는 아무도 없는 광야로 들어가 버린다. 엘리야가 이렇게 불안해했던 적이 한 번도 없었다. 아합의 왕궁에 가서 그 당당하게 외치던 모습을 보라. 도대체 그 믿음은 어디로 간 것인가? 사렙다 과부의 기름병과 밀가루 통을 마르지 않게 하던 그 확신은 어디로 갔을까? 과부의 죽은 아들을 살리던 그 용기가 지금은 왜 없는 것일까? 하늘에서 불을 내리게 하던 그 기도의 능력이 왜 이렇게 무력해진 것인가? 기도 한 번 제대로 하지도 못하고 목숨을 위해 도망치던 엘리야의 모습은 마치 패잔병과 같다. 가장 나약한 인간의 모습 그대로이다. 탈진이 되면 우리도 그럴 수 있다는 것을 우리는 엘리야를 통해서 생생하게 볼 수 있다.

         엘리야가 이렇게 탈진하게 된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 이세벨이 자기를 죽이겠다는 협박을 들었기 때문이다. 그의 말대로 내일 이맘때면 나는 죽는다고 생각한 것이다. 하지만 엘리야는 잘못 보았다. 그의 생각이 틀렸다. 이세벨은 엘리야를 죽일 수 없다. 이미 모든 백성들이 엘리야 편이다. 또한 엘리야를 죽일 계획이라면 아무도 모르게 군사를 보내서 그 날 밤에 죽일 일이지 왜 내일 죽이겠다고 하는가? 그것도 친절하게 사신까지 보내서 계획을 알려주는 이유가 무엇인가? 화는 나지만 죽일 수가 없기 때문이다. 이미 나라의 힘은 이세벨에게 있는 것이 아니다. 엘리야가 더 큰 힘을 갖고 있다. 하늘에서 불을 내리고 비를 내리는 사람을 누가 건드릴 수 있겠는가? 엘리야가 제발 이스라엘에서 떠나 주었으면 하는 것이 이세벨의 숨은 의도였다. 그것을 엘리야가 잘못 본 것이다. 단순히 일이 너무 많아서 탈진하는 것이 아니다. 힘들어서 지치는 것이 아니다. 왜 내게만 일이 많으냐고 불평을 한다. 다른 사람은 일도 안 하는 데 왜 나만 계속해야 하는 지 불편한 마음이 생긴니다. 이것이 탈진의 시작이다.  왜 일이 많은 것인가? 왜 내게만 일이 주어지는 것인가? 사실 내가 받을 복 아닌가? 내가 인정받기 때문이 아닐까? 아무 것도 일을 하지 않은 사람에게 하늘 상은 주어지지 않는다. 일이 많다는 것은 상도 많다는 것이다. 내게 주어진 일이 하나도 없어보라. 그것처럼 기운 빠지는 일은 없다. 일이 없는 것은 결코 복이 아니다. 내 존재가치는 무엇인가 기여할 때 느껴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두 번째 탈진의 이유는 꿈을 잃어버렸기 때문이다. 꿈이 없어지면 모든 일이 힘들어진다. 목표가 없는데  일을 왜 하겠는가? 아무 의미도 없다. 의욕도 생기지 않는다. 결국 죽고 싶은 생각까지 드는 것이다. 엘리야도 그 단계까지 갔다. “하나님, 이제 충분합니다. 할 일 다했습니다. 더 이상 하고 싶은 일도 없습니다. 제 생명을 거두시옵소서. 죽고 싶습니다.” 모세도 똑 같은 말을 한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만나에 대해서 불평하기 시작했다. 고기를 안 준다고 울부짖었다. 한 두 사람이 그렇게 운 것이 아니다. 집집마다 울음소리가 메아리 쳤다. 그 모습을 보고는 모세도 이제 화가 머리끝까지 올라왔다. 얼굴이 벌개졌다. 더 이상 그들을 인도하는 일을 하고 싶지 않았다. 가나안이라는 목표가 사라졌다. 다들 애굽으로 돌아가자고 했기 때문이다. 모세도 흔들렸다. 목표가 상실되자 하나님께 이렇게 말한다. “모세가 여호와께 여짜오되 어찌하여 주께서 종을 괴롭게 하시나이까 어찌하여 내게 주의 목전에서 은혜를 입게 아니하시고 이 모든 백성을 내게 맡기사 내가 그 짐을 지게 하시나이까 이 모든 백성을 내가 배었나이까 내가 그들을 낳았나이까”(민11:11-12). 그리고는 이렇게까지 말한다. “구하옵나니 내게 은혜를 베푸사 즉시 나를 죽여 내가 고난 당함을 내가 보지 않게 하옵소서”(민11:15). 꿈을 상실하자 모세는 백성을 인도하는 일이 짐이 되어버리고 만 것이다. 꿈이 있을 때는 사명이다. 그러나 꿈이 없어지면 똑 같은 일이 짐이 되어버리고 만다.   부모가 자녀를 돌보는 것은 사명이다. 그것을 짐으로 생각하지 않는다. 마약을 하는 자녀가 집에 돌아오지 않았다. 어디서 자는 지 어떻게 먹는 지 조차 알 길이 없었다. 너무나 안타까운 마음에 엄마는 2년 동안을 차고에서 침낭을 깔고 잤다. 누가 그렇게 하라고 한 것도 아니다. 왜 편한 침대를 두고 그 추운 바닥에서 지내야 하는 것인가? 자식은 차가운 길바닥에서 잘지도 모르는데 엄마인 내가 어떻게 따뜻한 방에서 편한 침대에서 잘 수 있느냐고 오히려 반문을 했다. 결국 엄마의 그 사랑 때문에 아들은 2년 만에 집에 들어왔다. 그리고 새사람으로 변화가 되었다. 이것이 사명이다. 부모는 그 아들이 잘 될 것이라는 꿈을 절대 포기하지 않는다. 꿈이 있으면 아무리 힘든 일이 있어도 탈진하는 법이 없다. 주변 상황이 아무리 칠흑처럼 어둡다고 해도 꿈을 포기해서는안 되는 이유는 바로 이것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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