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5대 미국 대통령을 뽑는 선거가 한 달도 채 남지 않았다. 미국 뿐만 아니라 전세계에서도 초미의 관심사다. 민주당의 힐러리 클린턴, 공화당의 도널드 트럼프 두 대선 후보가 지난 7월말 양당 전당대회 이후 숨가쁘게 달려온 대선 레이스는 이제 한 달 뒤면 ‘미국 최초의 여성 대통령이냐’,‘억만장자 출신 아웃사이더 대통령이냐’를 결정하는 역사적 순간을 맞이하게 된다. 지상 최대의 정치쇼라 불리는 힐러리 대 트럼프 대선주자의 TV 토론도 관심을 끌고 있다. 현재까지 2차 토론을 마친 상태이다. 우선 지난 9월 26일에 열린 1차 TV 토론이 36년만에 최고의 시청률을 기록했던 것을 보면 두 사람의 대결이 세기의 대결임은 분명해 보인다. 뉴욕 헴프스테드 호프스트라 대학에서 열린 1차 토론에서는 힐러리가 승리했다.

         이날 토론에서 트럼프는 클린턴의 아킬레스건인 이메일 스캔들과 건강 문제를 정면으로 제기했고, 클린턴은 트럼프를 인종차별주의자와 성차별주의자로 몰아세웠다. 그리고 트럼프는 또다시 한국의 방위비 체제에 돌을 던졌다. 그는 미국의 전통적 동맹 체제에 의문을 제기하면서 “미국은 세계의 경찰이 될 수 없으며, 일본을 방어하고 한국을 방어하는데 그들은 우리한테 돈을 안 낸다.”면서 한국 등 동맹국의 ‘안보 무임승차론’을 거듭 제기하며 보수 우파의 표심을 겨냥했다. 이에 힐러리는 상호방위조약을 맺고 있는 동맹의 중요성을 거듭 강조했다. 또, 힐러리는 건강 문제에 관련된 공격을 예상한 듯 토론 내내 의연하게 대처하며 여유를 보인 반면, 트럼프는 시간이 지날수록 혼잣말이 많아지고 물을 마시는 등 세계 최강대국의 대통령 후보라는 격있는 분위기를 연출하는 데는 실패한 듯 보였다.  1차 토론이 ‘힐러리의 승리’라고 평가하는 이유는 트럼프가 사실여부 확인 시스템에서 졌다는 데 있다. 미 대선 최대 분수령으로 꼽히는 1차 TV 토론의 또 다른 핫이슈는 ‘팩트 체크(fact-check)’였다. CNN방송과 뉴욕타임스 등을 비롯한 미국 주요 언론들은 90분간 토론이 진행되는 도중 실시간 팩트 체크를 통해 후보자가 사실을 말하고 있는지를 가렸다. 미 언론들은 이날 팩트 체크 부문에서는 클린턴이 압승을 거뒀다는 평가를 내놓았다. 1차 토론에서 나온 거짓말을 세어보니 트럼프는 16차례나 되는 반면, 클린턴은 하나도 없었다는 결론이다. 지난 주말 2차 TV 대선 토론회를 마치면서 힐러리의 지지율이 또다시 올라갔다. 이는 최근 트럼프의 ‘여성 비하 녹음 파일’이 폭로되면서 정치인들의 잇따른 지지 철회와 사퇴 압박이라는 대선 사상 초유의 사태가 발생한 것과 맞물린다. 최근 워싱턴포스트지가 공개한 녹음파일에는 저속한 용어로 유부녀를 유혹한 경험, 여성의 신체 부위에 관한 상스러운 표현 등이 담겨 있다. 뿐만 아니라 트럼프가 지난 6월에 맨해튼 연방지법에 성폭행 혐의로 소송이 접수된 법원 기록도 공개되면서 상황은 일파만파로 커지고 있다.

         큰 탈 없이 대권 고지의 9부 능선까지 도달했으나 이 녹음파일과 성폭행 소송은 그를 낙마 위기라는 최악의 궁지로 내몰고 있다. 이 파일 외에도 트럼프는 지난해 6월 대선 출마 이후 폭스뉴스의 여성 앵커 메긴 켈리를 섹시한 외모에 머리 빈 여자를 폄하하는 비속어인 ‘빔보’(bimbo)라고 불렀고, 경선 경쟁자 칼리 피오리나 전 휴렛팩커드 최고경영자의 얼굴을 조롱하는 등 숱한 여성비하 발언을 일삼았다. 이미 연방소득세 회피 의혹으로 적잖은 상처를 입은 트럼프는 자신이 평소 내뱉었던 여성 비하 발언들이 부메랑이 돼 돌아오면서 최대 위기를 맞은 것이다. 이에 공화당은 패닉에 빠졌고, 단순한 비판을 넘어 후보직 사퇴를 요구하는 목소리가 잇따라 터져나오고 있다. 유타 주의 하원의원과 주지사, 앨라배마 하원의원, 네바다 하원의원과 아널드 슈워제네거 전 캘리포니아 주지사 등이 트럼프에 대한 지지를 철회했다. 또, 유타, 일리노이, 네브래스카 상원의원과 이 곳 콜로라도의 마이크 코프만 하원의원, 그리고 공화당 권력서열 3위인 존 튠 상원 상무위원장까지 트럼프의 사퇴를 공개 촉구하고 있다. 트럼프의 펜트하우스가 있는 뉴욕 트럼프타워 밖에서는 성난 시위대가 몰려들어 그의 사퇴를 촉구했다. 대선이 후반전에 접어든 가운데 선거 막판 승부를 가를 변수들은 많다. 트럼프는 계속 열세를 보일 경우 선거 막판 다시 힐러리의 건강 문제를 거론할 가능성도 있다. 하지만 트럼프의 납세기록 역시 이변을 초래할 주요 변수가 될 소지가 충분하다. 트럼프가 지난 18년간 연방소득세를 한푼도 내지 않고 면제받은 것은 꼭 불법행위가 아니라고 할지라도 대선 후보로서의 도덕성에는 중대한 타격을 받게 된 것이 사실이다. 현재 대선 판세는 힐러리 후보가 여론조사에서 트럼프 후보에게 최대 15% 포인트 가량 우위를 보이고 있는 양상이다. 당선을 결정짓는 선거인단 확보 경쟁에서도 힐러리가 앞선다. 리얼클리어폴리틱스에 따르면 현재 힐러리는 260명의 선거인단을 확보한 반면에 트럼프는 165명에 불과하다. 즉 힐러리는 과반인 매직넘버 270명 확보를 눈앞에 두고 있는 셈이다. 매직 넘버를 넘기는 쪽이 대통령이 된다.  그러나 두 후보가 ‘역대급 비호감’ 으로 평가되면서 30%에 이르는 부동층 표심, 경합주, 하루가 멀다하고 터져 나오는 돌발변수 등으로 승패를 예단하기 힘들다는 게 전문가들의 관측이다.

          하지만 트럼프의 진심은 의심받기에 충분하다. 그는 TV 대선토론을 1달정도 앞두고 반성문을 발표한 적이 있었다. 지난 8월에 있었던 노스캐럴라이나주 샬럿 유세에서 트럼프는 거의 회개에 가까운 반성을 했다. 지금까지 잘못된 말들을 자주 했으며 남들을 불편하게 한 것에 후회한다는 내용이다. 지난 15개월의 캠페인 기간 동안 트럼프는 인종과 성별, 종교와 국가, 심지어 장애인에 대한 무분별한 막말을 쏟아냈다. 주위의 거센 비난에도 꿋꿋이 욕설을 계속했던 그가 처음 공개적으로 자신의 언사를 반성한 것이다.  그리고 몇 주 후 트럼프는 또 한 차례 변신을 시도했다. 히스패닉계 커뮤니티 리더들과 면담하는 자리에서 ‘적절한 자격을 갖출 경우 불법체류자라도 추방의 두려움 없이 살 수 있도록 허용하는 방안을 발표할 계획’이라고 밝힌 것이다. 불법체류자 모두를 추방하겠다며 으름장을 놓았던 기존의 공약을 번복한 발언이다. 미국땅에서 불체자를 뿌리뽑아야 한다며 불체자를 ‘강간범’으로까지 비하했던 그에게 이는 변화가 아닐 수 없다. 이민자 표심을 잡아야 대선에서 이길 수 있다는 현실을 받아들인 것일까. 상식을 넘어선 행보로 많은 사람들에게 상처를 주었던 트럼프. 이제는 반성모드로 돌아서 불법체류자들까지 끌어안겠다는 트럼프. 둘 중 어느 것이 그의 진짜 모습일까. 트럼프가 진정으로 지난날의 과오를 뉘우치고 있는지, 아니면 백악관 입성을 위해 본연의 모습을 잠시 숨기고 있는지 지금은 알 수가 없다. 하지만 분명한건 한번의 반성으로 지난 잘못을 묵과하기에는 그의 말이 남긴 상처가 너무 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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