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부터 있었던 길은 없습니다. 길이 없던 산이나 들을 아침 저녁으로 걸어 다니다 보면 어느덧 길이 만들어지는 것입니다. 한 번도 가 보지 않은 낯선 곳에 가면 길부터 찾습니다. 길이 없이는 목적지를 향해 갈 수 없기 때문입니다. 길을 찾아야 원하는 곳에 도달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의도적으로 길이 없는 곳에 새로운 길을 만들기도 합니다. 얼마 전 TV에서 중국의 험준한 산에 길을 만드는 프로그램을 감명 깊게 본 적이 있습니다. 수백 길 낭떠러지에 밧줄 하나에 매달려 길을 만드는 인부들의 모습이 안타깝기도 하고 숭고해 보이기도 했습니다. 일년에 한 두 번 명절에 집에 돌아가는 것 외에는 1년 내내 그 험준한 산에서 숙식을 하면서 길을 만들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하루에도 수십 번 그 길을 오고 갑니다. 철 빔을 박고 나무를 엮어서 하나 하나를 세워갑니다. 언젠가 그 길이 완성이 되면 많은 사람들이 그 길을 따라 가게 될 것입니다. 우리 마음도 마찬가지입니다. 마음에도 길이 있습니다. 어떤 생각을 자주 하느냐가 마음의 길을 결정하는 것입니다. 늘 부정적인 생각을 하면 마음에 부정적인 길이 납니다. 하지만 어떤 상황과 여건 속에서도 긍정적인 생각을 한다면 마음에 긍정적인 길이 나는 법입니다. 생각은 사물을 보는 시각을 결정합니다.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난 두 형제가 있었습니다. 같은 환경에서 자랐지만 둘은 너무나도 다른 삶을 살고 있었습니다. 형은 늘 실패를 거듭하면서 실의에 빠져 늘 무겁고 지친 삶을 살아갔습니다. 하지만 동생은 달랐습니다. 늘 진지했고 열심히 공부했습니다. 어떤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희망을 놓지 않았습니다. 그는 결국 박사 학위를 따서 인정받는 대학에서 교수가 되었습니다. 한 기자가 이들의 사정을 듣고 어떻게 똑 같은 환경에서 이렇게 다른 인물이 나오게 되었는지 추적조사를 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형제의 어린 시절 살았던 집에서 특이한 액자 하나를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Dream is nowhere’(꿈은 어느 곳에도 없다)라고 적힌 액자였습니다. 기자는 형제에게 그 액자를 기억하느냐고 질문을 던졌습니다. 형은 “예. Dream is nowhere. 그 액자는 20년 넘게 집에 걸려 있던 액자였죠. 전 늘 그것을 보며 자랐어요.” 그런데 동생은 미소를 지으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예, 저도 그 액자를 늘 보았습니다. 하지만 저는 띄어쓰기를 달리 해서 보았죠. Dream is now here. 꿈은 바로 여기에 있다. 전 늘 이렇게 생각하며 자랐죠.” 똑같은 현상이라도 어떻게 생각하느냐, 어떤 자세로 받아들이느냐에 따라 삶의 방식이 달라지고 결과 또한 달라진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불평의 눈으로 보면 모든 것이 불평거리입니다. 하지만 감사의 눈으로 보면 감사할 것이 참 많습니다. 심리학에 ‘프레이밍(Framing) 효과’라는 말이 있습니다. 원래 프레이밍이라는 단어는 사진 용어입니다. 프레이밍은 사진을 찍을 때 사진이 찍히는 대상(피사체)을 파인더에 적절히 배치해 화면을 구성하는 것을 말하는 작업입니다. 내가 원하는 대상을 어떻게 파인더에 배치하느냐에 따라 사진의 느낌과 구성이 달라집니다. 마찬가지로 사람들이 판단을 내릴 때 자신 보유하고 있는 생각의 틀(Framing)에 따라 이를 이해하고 결론을 내린다는 것입니다. 동일한 사건도 얼마든지 다른 시각에서 볼 수 있습니다. 사람들이 가진 프레임이 제 각각인 것 같지만 하나의 편향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프레이밍 효과의 중요한 점은 이런 특성을 발견하는데 있습니다. 그것은 사람들이 공통적으로 ‘손실 회피’를 추구하는 경향이 아주 강하다는 것입니다. 이익을 보기보다는 손실을 보는데 더욱 민감해 합니다. 손실이 발생하는 것을 싫어합니다. 이런 손실 회피 심리가 우리 행동의 전반을 차지하게 되는 것입니다. 부정적인 내용을 먼저 보여주면 실망이 훨씬 커집니다. 시간이 흘러도 그때 각인된 생각은 잘 바뀌지 않는 것입니다. 마음에 길이 그렇게 나고 마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을 앞에 두고 12명의 정탐꾼을 보내게 됩니다. 그들이 40일 정탐을 마치고 돌아왔을 때 10명은 극히 부정적인 보고를 합니다. “가나안 사람들은 키도 크고, 힘도 세며, 거인들과 같이 보였다. 그들에 비하면 우리는 메뚜기만도 못하다” 그 보고를 들은 온 이스라엘 백성들이 통곡하며 울었습니다. 10명의 정탐꾼이 생각했던 ‘메뚜기 자아상’이 그대로 모든 백성들에게 각인이 된 것입니다. 가나안에 들어가면 살아남을 자가 하나도 없다는 생각이 그들을 지배했습니다. 백성들의 마음에 이미 가나안은 들어갈 수 없다는 길이 나고 만 것입니다. 여호수아와 갈렙은 다르게 보고 했습니다. “우리는 들어갈 수 있다. 그들은 물론 강하다. 그러나 하나님이 함께 하시면 우리는 능히 그들을 물리칠 수 있다.” 하지만 이미 부정적인 마음의 길이 난 사람들에게 이들의 긍정적인 보고는 아무 영향도 미치지 못했습니다. 왜 하나님은 이들의 길을 다시 광야로 돌이키셨을까요? 며칠 만 더 가면 가나안을 갈 수 있는데도 하나님은 다시 광야에서 38년을 보내게 하셨습니다. 결국 가나안은 들어갈 수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의 마음의 길은 다시 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마음에 한 번 난 길이 얼마나 중요한 지 모릅니다. 그 마음의 길을 우리는 평생 걸어가기 때문입니다. 마음에 어떤 길이 났느냐에 따라 결말은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가나안을 절대 들어갈 수 없다고 생각한 사람들은 모두 광야에서 죽었습니다. 하지만 가나안을 정복할 수 있다는 길이 마음에 난 여호수아와 갈렙은 가나안 땅을 감격스럽게 밟을 수 있었습니다.

         조선 시대에 미래를 내다보는 혜안이 아주 밝은 선사가 있었습니다. 세 사람이 과거 시험을 보러 가던 중에 그 사람을 찾아갔습니다. “과거에 급제할 수 있을지요?” 세 사람은 걱정도 되고 궁금한 마음에 간절하게 물어 보았습니다. 그 선사는 눈을 감고 한참을 생각하다가 손가락 하나를 내밀면서 이럴 말을 했습니다. “시간이 지나면 이 손가락이 무엇을 의미하는 지 알 것입니다. 하늘의 뜻이라 지금은 말할 수 없습니다.” 세 사람은 더 이상 묻지 않고 길을 떠났습니다. 그들이 떠난 후 한 제자가 스승에게 물었습니다. “스승님, 한 손가락은 무슨 의미입니까?” 세 명 중 한 명만 급제한다는 뜻입니까? “만약 그리 된다면 그런 뜻이겠지.” “그럼 두 명이 붙으면 틀린 것 아닙니까?” 그땐 한 명이 떨어진단 뜻이다.” “만약 셋 다 급제한다면요?” “그것은 하나도 빠짐없이 합격한다는 뜻이지.” 선사는 말을 이어 나갔습니다. “나쁜 예언이 나오면 낙담해 능력을 발휘하지 못하고, 잘된다 하면 경솔해지는 법이지. 예언보다 더 중요한 건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가?’라네” 우리 마음엔 어떤 길이 나 있는 것일까요? 어떤 상황이냐가 문제가 아닙니다.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가에 따라 우리 마음의 길은 나는 것입니다. 한 번 마음에 길이 나면 좀처럼 바꿔지지 않습니다. 처음부터 어떤 길을 내는가가 중요합니다.
저작권자 © 주간포커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