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소득이 5000달러에 이르게 되면 모유로 기르는 아이보다 우유로 양육되는 아기의 수가 더 많다고 한다. 양육보다 성적 유인 기구로서의 유방 기능에 집착하기 때문인데 이런 변화에 부응해 여성들의 고민도 젖이 안 나온다는 것보다 ‘사이즈가 너무 작다’ ‘예쁘지 않다’ ‘좌우동형이 아니다’라는 등의 형태학적 불만에 빠져 그 해결책에 골몰하기 시작했다.

유방이 남자의 성적충동을 유발하는 메커니즘은 아름다운 것을 인식하는 능력 즉, 심미안이 두뇌 속에 형성된 이후 진화된 특별한 성적 도발의 형태다. 아마도 두뇌발달의 결과 연상능력이 형성되면서 유방을 보고 섹스를 생각하는 지능이 생겼을 것이라고 학자들은 추리한다. 인간 이외에 영장류 동물까지도 유두는 가졌어도 유방이 없다는 것이 그 증거다. 그럼 왜 인간의 여성만 남자들의 눈에 잘 노출되는 자극적인 유방으로 발전하게 되었는가? 매우 궁금한 수수께끼가 아닐 수 없다.

생물학을 배운 사람들이라면, 여성의 부풀어 오른 유방이 ‘모친이 되기 위한 준비’라는 매우 상식적인 대답을 내놓을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정답이 아니다. 비교동물학적으로 아름답게 융기한 유방을 충분히 설명하는 내용이 아닌 것이다. 초기 인간의 여성에게 유방은 오직 후손을 양육하는 칼로리 공급의 목적으로 이용됐을 뿐이었던 것은 엄연한 사실이다. 그러나 유방이 크다고 산유량(産乳量)이 비례해 많아지지 않는다는 것에서 정답이 아니라는 것을 충분히 납득할 것으로 믿는다. 그리고 포유류 동물에서 가슴이 동그스름하게 부풀어 오르지 않았어도 새끼를 충분히 기를 수 있는 것을 보면 생리학적 이유로 인간의 여성 유방이 부풀어 올랐다고 말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런데 이렇게 모친이 아기에게 수유하는 것은 본능적인 모성애에 의한 것이지만 여성 자신이 얻는 이익은 아무것도 없다.

골프, 탁구, 테니스 등의 스포츠에서 방해가 될 뿐인데도 이런 장애물이 왜 인간의 꼬리처럼 퇴화하지 않고 남아 있는 것일까? 그것을 설명하기 위해서 행동과학자 데스먼드 모리스 박사의 주장을 여기에 소개한다. 인간이 영장류 동물에서 분리되어 호모사피엔스로 생활하면서 변한 행동의 하나가 두 발로 일어서서 걷는다는 것(二足直立步行)이었다.

이런 직립보행의 자세가 굳어지면서 동물과 같은 후방위로는 생식행위를 하기가 힘들게 체형이 굳어졌고 그것은 얼굴을 마주보는 대향위(對向位)의 방법이란 엄청난 변화를 강요했다. 문제는 연상력이 없던 시절에 발정한 암놈이 수놈을 유혹하는 수단으로 상용하던 섹스스킨(性皮紅潮現象)은 무용지물이 되어버렸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인간은 한 가지를 보면 열 가지를 생각해내는 높은 지능의 소유자인 점을 이용해 음부를 둘러싸고 있는 둔부의 아름다운 곡선 이미지를 간직한 좀 더 예술적 곡선미를 남성들의 눈높이에 형성하기 시작했는데 그것이 다름 아닌, 가슴에 있는 두 개의 둥근 유방이다.

이것은 엉덩이의 복사판으로 전면광고의 형태로 변모한 것이다. 여기서 사족을 달면, 여성에게 풍부한 지방조직 가운데서 유방과 히프를 구성하는 지방조직만큼은 과다한 식사로 인한 지방축적과 관계없이 단지 성을 조정하는 성 중추와 성호르몬의 작용 아래 통제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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