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블 C.B. 세블스키 부사장이 말하는 캐릭터 성공 비결

      '마블(Marvel)' 열풍이다. 2008년 영화 '아이언맨'을 시작으로 최근 '어벤저스2'에 이르기까지 영화 11편을 통해 한국에서만 누적 관객 약 4700만명을 끌어 모았다. 그러나 다른 나라와 비교하면 한국에서 얻은 인기는 별로 대단한 게 못 된다. 글로벌 박스 오피스 사이트 '모조(Mojo)'에 따르면 마블의 영화는 전 세계에서 40억달러 이상을 벌어들였다.
최근 7년간 영화 산업에서 눈부신 성장을 거뒀지만, 원래 마블은 만화책 회사다. 영화에 등장한 아이언맨, 캡틴 아메리카, 헐크 외에도 8000여 캐릭터를 보유하고 있다. 여전히 만화책을 출판하고 있으며, 수퍼맨·배트맨 등의 캐릭터를 보유한 DC코믹스와 함께 미국 만화 콘텐츠 분야에서 양강(兩强) 체제를 구축하고 있다. 마블 영화는 만화에서 개발된 캐릭터와 스토리 라인을 기반으로 한다. 최근 마블의 약진은 무엇보다 영화의 성공 때문이지만 근저에는 두터운 역사와 다양한 스토리를 지닌 캐릭터의 힘이 있는 것이다.

      마블 C.B. 세블스키 부사장이 말하는 캐릭터 성공 비결 ▲ 성형주 기자만화 콘텐츠 개발 부문을 총괄하는 C.B.세블스키(Cebulski·44·사진) 마블 부사장을 최근 조선일보가 주최한 아시안리더십콘퍼런스(ALC)에 참석했다. 그는 딱 봐도 100㎏이 넘어 보이는 거구에, 짧은 머리를 하고 거친 턱수염이 얼굴 절반을 분방하게 덮었다. 흰 티셔츠에 하늘색 남방을 덧입었는데, 한 기업의 부사장이라기보다는 만화와 영화에 미친 애호가에 더 가까운 모습이었다.
세블스키 부사장은 마블 캐릭터가 전 세계적인 인기를 끄는 핵심 요인으로 '사람이 먼저고, 캐릭터가 나중'이라는 점을 꼽았다.
"마블 캐릭터의 핵심에는 '인간성'이 있습니다. 영화를 보면 알겠지만 저희는 주인공들의 인간적인 면모를 드러내기 위해 애쓰고 있습니다. 헐크는 방사선에 노출된 핵 물리학자 '브루스 배너'가 본질입니다. 화가 나면 헐크로 변신하는데, 이를 피하기 위해 배너 박사는 늘 차분한 심리 상태를 유지하려고 노력합니다. 호크아이는 영화에서 아예 가족을 공개해 버렸습니다. 그 덕분에 어벤저스의 일원이지만 한 가정의 가장이라는 정체성이 더 뚜렷하게 드러났습니다. 마블 캐릭터의 정체성은 항상 사람이 1순위고, 캐릭터가 2순위입니다. 그 때문에 마블 영웅들은 '인간의 한계를 초월한 영웅'보다는 '우리와 비슷한 사람'이라는 공감대가 생깁니다.

      마블의 슬로건은 '창 밖의 세상을 그대로 비춰주는 것(reflect the world outside the window)'입니다. 현실에 존재하는 현상을 만화책이나 영화에 그대로 옮긴다는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마블의 영웅들은 불완전(imperfect)합니다. 세상 그 어디에도 '완벽한' 사람은 없기 때문이죠. 아이언맨만 해도 알코올 중독자인걸요. 사람들은 영웅들이 보여주는 이 같은 인간적인 허술함에 스스로를 투영합니다. 그것이 마블의 캐릭터가 사람들의 공감을 얻는 이유입니다."
세블스키 부사장은 잠시 물을 한 모금 들이켜고 말을 이어갔다.
"마블은 두 가지 목적을 두고 콘텐츠를 개발합니다. 하나는 '영감을 주는(inspirational)' 것이고, 또 하나는 '열정을 심는(aspirational)' 겁니다. 저희는 어린아이들이 저희 캐릭터를 보면서 영감을 얻길 바랍니다. 사실 세상 사람 누구나 영웅이 될 수 있습니다. 초인적인 힘을 가지고 있어서 영웅이라는 게 아니라, 다른 사람을 돕고 사회에 이바지하는 영웅 말입니다. 또 한편 저희는 열정을 심어주길 바랍니다. 사실 마블 캐릭터들은 모두 치명적인 단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아이언맨은 심장이 없고, 헐크는 화가 나면 괴물이 됩니다. 그러나 이들은 좌절하지 않고 자신들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끊임없이 도전하고 현실과 맞섭니다. 우리는 모두 고민거리를 하나쯤 떠안고 있습니다. 저희는 사람들이 마블 캐릭터의 도전 정신을 보고 각자의 난관을 극복하길 바랍니다."

아이언맨은 옷을 입고, 수퍼맨은 옷을 찢는다 

       가짜 심장을 가진 아이언맨, 분노 조절 장애를 가진 헐크 등은 지구를 구하는 영웅보다는 허점 많은 인간에 가깝다. 물리적으로나 정신적으로 초인적인 면모를 가진 수퍼맨·원더우먼 등 DC코믹스의 캐릭터와는 사뭇 다르다. 세블스키 부사장은 마블과 DC에는 세 가지 차이점이 있다고 설명했다.
"DC는 영웅이 곧 캐릭터의 정체성이고, 인간은 이 정체성을 드러내지 않기 위한 겉옷입니다. 수퍼맨은 신문사 기자인 '클락 켄트'로 활동하지만, 항상 안에는 수퍼맨 복장을 입고 있습니다. 위기의 순간에는 옷을 찢고 수퍼맨으로써 세상을 구하러 날아가죠. 즉 클락 켄트는 수퍼맨임을 가리고 현실 세계에 적응하기 위한 가짜 정체성이라는 겁니다. 반면 아이언맨은 처음부터 스스로 '토니 스타크'라는 걸 대중에게 공개했습니다. 그는 평상시에는 토니 스타크라는 기업가로 활동하다가, 위기가 닥치면 아이언맨 슈트를 입고 떠납니다. 이는 캐릭터를 개발하는 방식부터가 다르다는 뜻입니다. 마블 캐릭터는 능동적인 데 반해, DC는 수동적입니다. DC의 영웅들은 자신들의 베이스캠프에 자리 잡고 앉아 위기가 터지기를 기다립니다. 반면 마블 영웅들은 나쁜 일이 터지기 전에 먼저 예방 조치를 취하려고 합니다. 비록 그게 실수라고 해도요. 이번에 나온 어벤저스2를 봐도, 미래의 위기를 직감한 아이언맨이 이를 막으려고 새로운 방어 체계를 구축하려다가 '울트론'이라는 적을 만들어냈죠. 마지막으로 DC는 선과 악의 구분이 뚜렷한 반면, 마블은 모든 캐릭터가 영웅이면서 동시에 악당입니다. 캐릭터들은 각자가 처한 상황에 따라 선과 악을 오갑니다. 이는 각자 입장이 서로 다른 현실 세계를 반영한 겁니다. 따라서 종종 어벤저스 팀원끼리 싸우기도 합니다. 어벤저스 1편에서는 '로키'라는 캐릭터가 악당으로 나오지만, 나중에는 어벤저스로 합류합니다."
최근 마블 캐릭터가 DC의 캐릭터와 비교했을 때 더 큰 인기를 누리고 있는 것은 우리 사회 트렌드와도 밀접한 관련이 있다고 전문가들은 얘기한다. 홍범식 베인앤컴퍼니 대표는 "과거에는 하늘을 날아다니고 빔을 쏘는 수퍼맨이 동경 대상이었다면, 지금은 기술이 발전하면서 수퍼맨의 힘이 더 이상 실현 불가능한 과제가 아니게 됐다"며 "오히려 기술이 너무 발전해 인간성에 대한 동경이 생겼고, 이를 잘 드러내는 마블 캐릭터가 사람들에게 더 큰 인기를 얻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마블이 사람의 몸이라면 만화책이 심장이다 


      마블 C.B. 세블스키 부사장이 말하는 캐릭터 성공 비결 마블은 현재 세계에서 가장 탄탄한 엔터테인먼트 회사지만, 20년 전만 해도 도산 위기에 몰린 회사였다. 세블스키 부사장은 "전통을 지키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그 이유를 설명했다.
"어느 순간 경영진은 핵심인 콘텐츠 개발보다는 광고나 그래픽 효과 등 다른 부분에 집중 투자하기 시작했습니다. 캐릭터들은 1930~1940년대에 만들어졌는데, 1990년대까지도 시대 상황을 반영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당연히 고루해지고 재미도 없어졌죠. 결국 독자들의 관심을 잃으면서 도산 위기에 처한 겁니다. 2001년 저희는 다시 콘텐츠 개발에 힘쓰기로 했습니다. 저희는 뛰어난 역량을 가진 작가들을 고용하고, 스파이더맨·엑스맨 등 인기 캐릭터를 업데이트하기 위해 힘썼습니다. 그 프로젝트의 이름이 '부활(rebirth)'이었습니다. 덕분에 회사는 정말로 부활할 수 있었죠."
세블스키 부사장은 "마블이라는 회사가 사람의 몸이라면, 캐릭터와 콘텐츠가 곧 심장"이라고 말했다.
"지금은 영화가 마블의 핵심 수익 모델입니다. 사람들은 영화의 화려한 그래픽 효과나 멋진 배우들을 보고 감탄하죠. 저는 그래서 영화 산업은 화장 예쁘게 한 '얼굴' 같은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마블은 캐릭터를 활용한 게임이나 장난감도 판매합니다. 이건 '팔'이나 '다리' 같은 겁니다. 그러나 머리나 팔·다리만으로는 인체가 살아서 움직이지 못합니다. 얼굴이나 팔다리에 신선한 피를 공급하는 건 결국 '심장'이고, 저는 그것이 캐릭터와 콘텐츠라고 생각합니다. 저희는 새 캐릭터를 개발하고 새로 업데이트된 스토리를 구성합니다. 마블이라는 인체에 끊임없이 신선한 피를 공급해주는 것이죠."

10대 소녀가 요즘 영웅 트렌드

      마블 C.B. 세블스키 부사장이 말하는 캐릭터 성공 비결  실제로 최근 마블에는 신선한 피가 공급되고 있다. '런어웨이스' '미스 마블' '스파이더 그웬' 등 만화책 부문에서 새로 개발된 캐릭터들이 대중의 인기를 얻기 시작했다는 것이 세블스키 부사장의 설명이다.
"사실 새 캐릭터를 공개하는 것은 무척 어려운 일입니다. 독자들은 스파이더맨, 캡틴 아메리카, 엑스맨처럼 옛날 캐릭터들을 더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옛날 캐릭터에만 집착해서는 회사가 지속 가능하지 않습니다. 새 팬을 끌어모아야 합니다. 그래서 저희는 매년 새로운 캐릭터를 지속적으로 개발하고 있고, 최근 10년 동안 꽤 의미 있는 성과를 거두게 됐습니다. 런어웨이스는 초인적인 힘을 가진 10대 소년 소녀들이고, 미스 마블은 10대 중동계 소녀 영웅입니다. 스파이더 그웬은 스파이더맨의 여자 친구인 그웬 스테이시가 스파이더맨의 힘을 가지게 된 상황을 그립니다.
그런데 최근 인기를 끄는 캐릭터들 사이에는 한 가지 공통점이 있습니다. 모두 10대 소녀라는 겁니다. 저는 이게 현재 사회를 이끄는 영웅의 트렌드라고 생각합니다. 예전에는 마블 캐릭터들이 죄다 10~20대 백인 남성이었습니다. 그런데 요즘 사회에서는 여성의 역할과 힘이 중요해지고 있어요. 아시안리더십콘퍼런스에서 마윈 알리바바그룹 회장도 회사에 여성 직원들이 절반이라고 말했는데요. 마블 직원들의 성비도 비슷합니다. 이런 사회 트렌드에 맞춰 특히 10대 소녀들에게는 새로운 역할 모델이 필요해지게 됐습니다. 저희 새 캐릭터들이 그런 역할로 자리 잡고 있는 겁니다."

      세블스키 부사장은 새로 캐릭터를 개발하는 창의성은 어디에서 나오느냐는 질문에 확신에 찬 목소리로 "모든 건 뛰어난 작가들 덕분"이라고 말했다.
"저희는 늘 세계 최고 작가들을 고용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습니다. 마블은 세계 최고의 선수들이 모이는 메이저리그 야구팀, 프리미어리그 축구팀 같은 곳이라고 보면 됩니다. 예컨대 뉴욕 양키스에서 뛰는 선수들은 어렸을 때부터 유소년 리그, 고등학교 야구팀, 대학 야구팀에서 실력을 입증하고, 드래프트를 통해서 프로로 진출합니다. 마블도 비슷합니다. 업계에서 두드러진 성과를 내면, 저희 인사 담당자가 스카우트하는 거죠. 저희는 자체적으로 인재를 육성하는 프로그램은 없지만, 만화·영화·비디오 게임 업계에서 누가 제일 재미있는 콘텐츠를 만드는지 항상 주시하고 있습니다. 짧게는 1년, 길게는 3~4년 지켜보면서, 업계 최고의 인재라는 판단이 들면 영입합니다. 최근에 한국 웹툰 작가인 고영훈씨를 영입했는데, 마치 류현진 선수가 LA 다저스에 진출한 것과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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