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베 신조 일본 총리가 다음 달 26일부터 5월3일까지 7박8일간 일정으로 미국을 공식 방문한다. 미국 방문 기간동안 버락 오바마 대통령과의 정상회담은 물론, 그동안 논란이 돼온 미국 상ㆍ하원 합동연설도 확정됐다. 상·하원 합동연설은 미국이 제공하는 최고의 예우인데, 그동안 한국은 여러 차례 합동연설을 했지만 일본은 그런 기회를 갖지 못했다. 제2차 세계대전의 전범, 패전국이란 원죄 때문이다. 미일 밀월을 구가하던 고이즈미 준이치로 총리 시절이던 2006년에 상하원 합동연설이 이뤄질 뻔했으나 미국 참전용사들의 반대로 무산됐었다. 이번 연설은 존 베이너 하원의장의 초청에 따른 것으로, 일본 현직 총리로는 사상 처음으로 미 의회 합동연설을 하는 것이다. 때문에 대외적으로도 의미가 각별하다. 종전 70년에 성사된 만큼 그런 시대의 종언(終焉)이라는 상징성을 갖는 것이다. 그런데 솔직히 우리 기분은 그다지 달갑지 않다. 일본의 환태평양 경제 동반자 협정(TPP) 참여, 중국 시진핑 주석이 주도하는 아시아 인프라 투자은행(AIIB) 반대, 미일 방위협력지침 재개정 등 친미노선이 더욱 선명해지고 있기 때문이다. 무기체계의 공동 개발·운용을 넘어 공동 작전지휘까지 거론되고 있다.

    믿었던 미국도 일본쪽으로 기울어져 보인다. 이번달 초 미 국무부 서열 3위에 해당하는 웬디 셔먼 차관의 “과거의 적을 비난해 값싼 박수를 받는 정치”라는 발언은 실언(失言)이 아니었다. 그는 미국의 대표적인 한반도 전문가이고 대북정책조정관 출신이다. 오랜 업무경험을 통해 한국, 중국, 일본 등 동아시아의 역사에 매우 밝다. 그런 그가 최근 카네기 평화재단 연설에서 박근혜 정부를 겨냥해 정치 지도자들이 과거의 적을 비난해서 값싼 박수를 받아내는 것은 어렵지 않다고 말한 발언은 무슨 의미일까. 이런 건방진 훈수질에 우리 한국 네티즌과 정치권은 난리가 났었다. 심지어 미국내 한 보수언론에서도 “박 대통령은 값싼 박수를 받기 위해 민족감정을 악용하지 않았고, 오히려 셔먼 차관이 쓸데없이 동맹국을 욕했다”며 공식적으로 한국의 편을 들기도 했다. 사정이 이럼에도 불구하고 한국 외교부는 오히려 미국을 옹호하는 모습까지 보여 국민을 실망시켰다. 굳건한 한미동맹이 필요한 한국이 바로 욱한다는 것은 외교 처세에서 옳지 못한 모습이라고 판단했다고 한다. 하지만 이번 셔먼 차관의 발언은 현재 미국의 본모습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는 듯하다. 미국의 입장에서 한국과 일본의 동맹은 필수적이다. 여전히 동북아 패권을 놓고 싶지 않은 미국은 동북아의 맹주로 올라서고 중국을 견제해야 한다. 그런데 한국과 일본은 계속 으르렁거리고 있고, 박근혜 대통령은 오히려 중국의 시진핑과 더 친밀한 모습을 보이고 있으니 미국은 당연히 불만스러울 것이고 이 불만이 고위 공직자의 말로 튀어 나와버린게 아닐까 싶다.

    일본은 범죄자인 자신들의 조상을 떠받들고 있으며 결코 반성하지 않고 있다. 오히려 당시의 영광을 재현하기 위해 헌법을 뜯어 고치고 군사대국을 노리고 있다. 이런 일본의 움직임에는 미국의 수수방관적 자세가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그리고 미국은 이제 아예 대 놓고 일본을 도와주려고 한다. 미국이 원하는 방향으로 동북아시아 질서를 정립하려면 일본의 진정성 있는 과거사 반성이 핵심이다. 그런데 셔먼 차관은 핵심도 모르고 가해자와 피해자를 함께 욕하는 무례함을 보였다. 로비의 제왕 일본은 지금도 고위 공직자들을 대상으로 “한일관계의 악화는 한국의 지난친 과거사 집착 때문”이라며 로비를 하고 있다. 이런 말도 안되는 논리가 조금씩 먹혀들고 있는 것은 아닌지 우려스럽다. 이런 셔먼 차관의 무지한 훈수에 이어, 최근 미 국무부 영사국 홈페이지 지도에서도 독도가 일본 영토로 표기되어 온 것으로 드러나 물의를 빚고 있다. 이 여행 정보는 지난해 10월31일 갱신된 것으로,‘일본 편향’ 논란이 일자 지난주 월요일 다시 등장시켰다. 앞서 미 중앙정보국(CIA)도 지난 1월 초 국가정보보고서 한국편 지도에서 리앙쿠르 암초 표기를 삭제했다가 언론 보도로 문제가 되자 곧바로 복원한 바 있다. 리앙쿠르 암초는 서양 선박으로는 처음 독도를 발견한 프랑스 포경선 리앙쿠르호의 이름을 따서 붙여지면서 유럽에 알려진 명칭이다. 그러나 사실 리앙크루 암초라고 표기하는 것 자체도 독도를 한국영토라고 흔쾌히 인정하고 있지 않다는 뜻이다.

    중국의 부상에 따른 견제 필요성을 중시한 미국 주류의 현실주의 노선이 과거사를 넘어 일본과의 협력을 공고화하는 방향으로 가고 있는 것은 분명하다. 그리고 한국 외교는 이런 중대한 변화에 능동적으로 대응하지 못하고 있다. 이번 아베 총리 연설은 참담한 실패를 보여주는 상징적 사례다. “미국 정부 아닌 의회 차원에서 결정된 연설”식의 변명은 아직 그 의미조차 깨닫지 못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위안부 관련 여론과 이벤트에 매달리고 있을 때 일본은 치밀하게 미국 의회와 행정부를 움직였다. 위안부 문제 진전 없인 한·일 정상회담도 무의미하다는 박근혜 대통령의 원칙이 결정적 일격을 당한 것이다. 한국 정부는 이제부터라도 대미 외교 전략을 근본적으로 재검토하고, 중대한 전환기에 접어든 동아시아 역학구도 재편에 제대로 대응해야 한다. 다른 나라에서 전쟁이 일어나면 자국의 젊은 용병까지 지원해 달려가서 해결하려하는 이런 경찰국가에서, 빤히 보이는 일본의 위선적 행보를 수수방관하고 있다는 것은오히려 경찰국가로서의 체면을 구기는 일이 될 것이다. 미국 정부가 적극적으로 나서지 못한다면, 이제 미국에 사는 우리 동포들의 힘을 모아야 할 때이다. 어쩌면 일본의 진정한 사과를 받아내고, 미국의 정확한 입장 표명을 듣는 것이 남북통일 이전에 해결해야 할 숙제일 수 있다. 오바마 대통령과 아베 총리는 4월28일에 정상회담을 갖는다. 백악관은 보도자료에서 “미ㆍ일 정상이 2차 세계대전 이후 70년간 발전시켜온 강력한 협력관계를 평가하고 양국의 공동 가치와 원칙을 재확인할 것”이라고 밝혔다. 특히 두 정상은 동북아시아 지역의 경제협약과 글로벌 이슈에 있어 확대되는 일본의 역할 등을 논의할 예정이다. 이 과정에서 ‘한ㆍ미ㆍ일 3각 협력’을 강조해온 미국이, 한ㆍ일 과거사 갈등에 있어 일본측에 어떤 입장을 전달할지 주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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