흰 옷을 입은 여인이 언덕에 서 있다. 양산을 쓴 모습을 보니 햇볕이 매우 강한 날인 듯 하다.  짧은 붓 터치가 만들어 낸 새털구름과 풋풋한 풀 무더기들이 여인을 받쳐 안는다. 이내 여인의 치마폭을 감싸고도는 바람이 빛과 어둠, 구름과 풀무더기에 자연의 역동성을 불어넣어 준다. 화가는 하늘빛과 잡초의 일렁임을 바람에 맡김으로서 조화의 극치를 추구한다. 바람이 하늘과 대지로 나타나는 삶과 죽음의 경계를 지배하도록 함으로써 여인이 안고 있는 불확실성을 극대화하지만, 멀찍이서 여인을 바라보는 어린 신사의 시선, 바로 모네의 사랑에 찬 눈빛을 등장시킴으로써 그림 전체의 안정감을 도모하고 있다.

      야외의 신선한 공기와 여인의 풋풋한 이미지가 한데 어우러져 싱그러운 느낌을 전해준다. 모든 것이 맑고 투명하고 아름답다. 화창한 날 오후에 한적하게 산책 나온 모네 가족의 행복한 모습을 느낄 수 있다.
하지만 아무리 자세히 봐도 여인의 얼굴이 선명하지 않다. 예쁜 얼굴인 것 같은데 화가가 붓을 거칠게 놀려 생김새를 정확하게 파악하기 힘들다. 클로드 모네(1840~1926)는 늘 이렇게 그림을 그렸다. 대상의 구체적인 모습보다는 빛과 공기의 흐름 등 주변 분위기를 살리는 데 더 관심을 뒀기 때문이다. 그런데 오히려 그렇게 그린 그림이 대상을 더 아름답게 느끼도록 만든다.
날씨와 계절, 시간 등에 의해 변하는 대상에 대한 느낌을 열성적으로 관찰하고 표현했던 모네의 인상주의 화법은 마치 부서지는 햇살을 받아 반사하는 사물의 색채감을 묘사한다. 혼합하지 않은 여러 색채를 그대로 캔버스에 옮겨 놓고 착시현상을 일으키듯 인간의 시선 속에서 용해되어 빛이 터지는 듯한 효과를 낳는 것이다. 자연의 변화에 흔들리는 인간의 마음이 화사한 빛이 맑게 퍼지는 모네의 캔버스 위에서 또 다시 여리게 흔들리고 있다. 모네는 알고 있는 색을 칠하지 않고 빛에 따라 시시각각 변하는 색의 느낌들을 그림에 담고 싶어했다. 그래서 여인의 머리 색은 양산의 빛을 받은 초록색으로, 바람에 나부끼는 머리카락은 하늘 빛을 받은 하늘색으로 칠했다.

      그림 속의 여인은 모네의 아내 카미유이고, 옆에 서 있는 소년은 아들 쟝이다. 모네가 무명의 화가로 고생할 때 묵묵히 뒷바라지해준 아내는 이처럼 모델도 서주는 등 물심양면으로 모네를 도왔다. 모네만큼 자신이 사랑한 여인을 화폭에 자주 담은 화가도 드물다. 그는 지금까지 밝혀진 것만 해도 무려 56점의 작품에서 카미유를 화폭에 담았다. 모네는 다른 모델은 마다하고 오직 카미유만을 불러들였고 카미유도 청년의 순수함에 이끌려 즐거운 마음으로 아틀리에를 방문하곤 했다. 둘은 낮에는 화가와 모델로 만났고 밤에는 연인으로 만나 떨어질 줄 몰랐다. 꿈같은 행복의 연속이었지만 그들을 둘러싼 세상은 젊은 커플을 끊임없이 괴롭혔다. 카미유와의 동거 이후로 큰아들 쟝을 임신했지만 모네의 식구들은 두 사람의 결혼을 반대했다. 모네가 동거를 시작할 때만 해도 그의 집에서 약간의 보조금을 보내줬는데 1870년 카미유와 결혼한 다음부터 아예 송금을 끊어버렸다. 그러나 가난의 세월 속에서도 모네의 창작욕은 더욱 뜨거워졌다. 카미유를 향한 사랑의 열정 또한 마찬가지였다. 1866~1867년에 제작된 「정원의 여인들」에 나오는 네 명의 여인은 모두 같은 사람이다. 바로 카미유이다.

     1871년부터 모네의 그림이 인기를 얻게 되면서 지긋지긋한 가난에서 벗어나는 듯했다.그러나 이듬해 그를 후원한 화랑이 재정난을 겪게 되면서 수입은 순식간에 3분의 1 이하로 줄었다. 카미유는 가난한 시절의 낙태 후유증을 앓고 있었지만 병원비를 마련할 방도가 없었다. 카미유는 그렇게 가난 속에서 제대로 치료도 받지 못한 채1879년 32세의 나이로 숨을 거둔다.
깊은 슬픔에 잠긴 모네는 사랑하는 아내를 쉽게 잊지 못해 나중에 재혼한 아내의 딸인 의붓딸을 모델로 세워 이 그림과 매우 유사한 그림을 몇 점 더 그리게 된다. 죽은 아내를 향한 자신의 사랑을 그렇게 해서라도 자꾸 표현하고 싶었던 모양이다.
카미유는 모네에게 사랑과 창작의 원천이며 힘들고 어렵던 시간마다 힘과 용기를 주는 존재의 근원이었다. 카미유만이 그의 영원한 모델이자 그의 작품에 표현된 빛 그 자체였다. 하나의 작품이 한 사람의 인생이라는 말의 의미를 알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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