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잔, 빨간 조끼를 입은 소년, 1890년 - 1895년, 캔버스에 유채, 80×64.5cm, 취리히 에빌 뷔를르 미술관.

 

      지난 2008년 2월10일 스위스 취리히의 사립 미술관인 에밀 뷔를르 컬렉션에서 4점의 작품이 도난당했다. 일요일이었던 이날, 슬라브계 억양이 섞인 독일어를 쓰는 3인조 무장 복면강도들이 박물관 문을 닫기 직전에 들이닥쳐 경비원을 총으로 협박하고 직원들을 마루바닥에 엎드리게 한 뒤 그림을 훔쳐간 것이다.
이들은 폴 세잔(1839~1909) 의 ‘빨간 조끼를 입은 소년(Le jeune homme en gilet rouge’), 클로드 모네의 ‘베퇴유의 양귀비 들판’과 고흐의 ‘활짝 핀 밤나무’, 드가의 ‘레픽 백작과 그의 딸들’ 등 총 4점의 명화를 가져갔는데, 네 작품의 당시 합산 호가는 1억6300만 달러에 달하는 것으로 알려져 스위스 최대의 예술품 절도 사건이 됐다. 이중 세잔의 ‘빨간 조끼를 입은 소년’의 당시 가치가 1억1000만 달러 정도였다. 당시 언론들은 이 사건을 유럽에서 가장 큰 예술품 도난사건 중 하나로 대서특필하기도 했다.
모네와 고흐의 작품은 며칠 뒤 취리히의 한 정신병원 주차장에 주차되어 있던 차 안에서 발견됐으나, 세잔과 드가의 작품은 발견되지 못했다.

     예술작품 전문가들은 “강도들이 그렇게 유명한 도난작품을 처분하는 게 얼마나 어려운지 모른 채 보안이 다소 허술한 박물관을 털었던 것 같다”고 지적했다.
이 무식한 강도들은 그저 눈에 띄는 대로 그림을 걷어 간 것인데, 불행히 미술관에서 가장 가치있는 것이 그들의 자루 속으로 들어 갔지만 9800만 달러의 두 번째로 비싼 보험에 들어 있던 세잔의 '팔레트를 든 자화상'은 그냥 놔두고 갔다.  아직 행방을 모르는 작품은 드가의 '레픽 백작과 그의 딸들'로 1,100만 달러 짜리다.
고흐, 고갱과 함께 프랑스 3대 후기 인상파 화가인 세잔의 작품인 ‘빨간 조끼를 입은 소년’은 1억원이 훌쩍 넘는 고가인데다 너무나 유명한 작품이기 때문에 훔쳐간 사람도 도저히 다른 사람에게 팔 수 없었던 작품이다. 설령 거래가 이뤄졌다 하더라도 산 사람이 자신이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영원히 드러낼 수 없기 때문이다. 도난 미술품을 산 사실이 혹시라도 알려지면 장물을 구매한 혐의로 처벌을 받는데다 그림도 빼앗기게 되니 말이다.

     결국 4년이 지난 지난 2012년 4월, 세르비아 경찰은 유럽 몇개국과 수개월에 걸친 공조로 베오그라드와 차차크에서 강도사건에 연루된 3명을 체포하면서 용의자들이 가지고 있던 ‘빨간 조끼를 입은 소년’을 회수하는데 성공했다. 불운한 강도들은 너무 유명한 작품을 훔치는 바람에 팔지도 못한 것이다.
‘빨간 조끼를 입은 소년’은 한손으로 얼굴을 받치고 무언가 뚫어져라 생각하는 소년의 모습이 인상적인 작품이다. 로댕의 ‘생각하는 사람’ 못지않게 사색의 표정이 잘 살아 있다. 차분한 얼굴 표정과 배경의 보랏빛 감도는 회색, 조끼의 빨간색, 셔츠의 흰색이 어우러져 멋진 색상의 조화를 자아내고 있다.
이 소년을 섬세하게 묘사하기 보다는 툭툭 던지는 붓터치로 선보다는 면을 살리는 기하학적인 요소를 강조했다. 세잔의 초상화의 특징은 인물의 정확한 묘사보다도 전체적인 분위기를 포착하는 데 중점을 두고 있는 점이다. 이 그림에서도 소년은 자신의 공간 속에 매몰되어 있는 듯이 보인다. 빨간 조끼도 이러한 분위기를 조성하는 한 요소이다. 이처럼 차분한 감정의 기근에도 불구하고 이 초상화는 세잔 특유의 활기찬 붓질로 실현된 색채의 멋진 조화와 생명감 때문에 당당하고 힘차다.
오른팔이 다소 길어 보이는데, 제대로 그릴 줄 몰라서가 아니라 화면 전체의 균형과 구성을 생각해 의도적으로 그렇게 그린 것이다. 세부 묘사를 섬세하게 살리기보다는 툭툭 던지는 붓질로 면을 살려 기하학적 요소를 강조했다. 이 작품은 사물의 형태를 단순화하고 붓 터치를 살린 그림으로 뒷날 입체파 미술과 추상미술이 나오는 데 큰 영향을 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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