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 파리에는 센 강을 가로지르는 명물 다리가 여러 개 있다. 그 가운데서 가장 재미있는 이름을 지닌 다리가 ‘퐁 뇌프(Pont Neuf)’다. ‘퐁 뇌프’라는 말은 프랑스어로 ‘새로운 다리’라는 뜻이지만, 사실 01578년에 주춧돌을 놓고 1607년에 완공된 다리로 파리의 센 강에서 가장 오래된 다리이기 때문이다. 당시에는 이 다리가 새 다리여서 그렇게 불렸는데, 가장 오래된 다리가 된 지금까지 계속 그 이름으로 불리는 것이 재미있다.
퐁 뇌프는 센강 우안(지도상의 북쪽)과 좌안을 연결하는 파리에서 세 번째로 긴 다리로 앙리3세 치세기인 1578년에 첫삽을 떴다. 부근의 노트르담 다리만으로는 늘어나는 교통량을 감당하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처음으로 새 다리를 만들 생각을 한 사람은 앙리2세였는데 비용 문제로 주판만 튕기다 세상을 떠났고 결국 셋째 아들인 앙리3세가 바통을 이어받아 삽질을 시작했다. 그런데 이번엔 신교와 구교 사이에 종교내란이 불거져 공사가 중단되고 말았다. 새로이 부르봉 왕조를 연 앙리4세(재위 1572~1589)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새로운 다리'는 파리의 대동맥으로 중책을 수행하게 된다.  일단 완공이 되자 퐁 뇌프는 단숨에 파리시민의 명소로 자리잡는다. 사람이 많이 모이는 곳은 으레 장사꾼과 협잡꾼의 텃밭이 되게 마련이다. 17세기에 들어서면 다리 좌우의 인도에는 좌판을 깐 상인들이 입추의 여지없이 들어서 행인들의 소매를 끌어당겼고 여기에 엉터리 약장수, 돌팔이 의사, 야바위꾼들까지 끼어들어 호객하는 등 하루 종일 북새통을 이뤘다. 곡예사, 만담꾼들도 이곳에서 자신의 장기를 뽐낸 후 동전 한 잎을 구했고, 거리의 여인들 역시 이곳을 영업장소로 활용했다.

      역사가 오래된 만큼 이 다리는 많은 미술인에게 사랑받았다. 여러 화가가 이 다리를 그림으로 그렸고, 심지어 크리스토 같은 설치 미술가는 지난 1985년에 이 다리 전체를 황금빛 천으로 둘러싸는 특이한 작품을 만들기도 했다.
인상주의 화가 피에르 오귀스트 르누아르(1841~1919)도 퐁 뇌프의 아름다움을 화폭에 담았다. 1872년에 그린 ‘퐁 뇌프’가 그 주인공인데, 르누아르의 그림답게 그림 속의 날씨가 매우 화창하다.
어느 햇빛이 따사로운 오후 르누아르는 동생 에드몽과 함께 루브루궁 부근 모퉁이 카페의 위층인 앙트르솔(1층과 2층 사이의 중간층)을 잠시 빌렸다. 퐁 뇌프의 일상을 화폭에 담기 위해서였다. 주인에겐 서너 시간 사용하는 대가로 커피 두 잔 값을 지불했다. 아직까지 빈털터리였던 르누아르로서는 좋은 앵글을 포착할 수 있다는 기대감에 큰 맘 먹고 주머니를 털었던 것이다.

     그가 굳이 앙트르솔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며 작업하려 한 것은 일본판화의 조감법에서 배운 시점을 실험하기 위한 것이었다. 화면을 보면 절반이 하늘 묘사에 할애돼 있어 하늘 묘사를 중시한 네덜란드 화가들의 영향도 엿보인다. 그러나 네덜란드 화가들이 하늘을 마치 인간 초상화 그리듯 구름의 주름살까지 세밀하게 그렸던 데 반해 르누아르는 야트막하게 듬성듬성 내려앉은 구름을 거친 필치로 대충대충 그렸다. 다리를 건너는 마차와 인파의 모습도 마찬가지로 그려나갔다. 퐁 뇌프가 내려다보이는 창가에서 바라보는 구도로 그려진 이 그림은 빠른 붓질로 움직이는 효과를 내 세느강과 어울리는 행인들의 여유로운 움직임까지도 잡아냈다. 르누아르는 시민들의 얼굴을 꼼꼼히 그리지는 않았지만, 화사한 빛을 통해 사람들의 밝은 표정이 절로 느껴지게 된다. 그는 퐁 뇌프를 빛의 효과를 탐구하는 하나의 실험적 무대로 활용했다. 한낮의 눈부신 빛이 파리지앵의 삶과 마주치면서 연출해내는 색다른 인상을 재빨리 포착하려 한 것이었다. 그의 야심찬 시도가 성공했던 것일까. 퐁 뇌프는 마치 은쟁반처럼 현란한 빛을 뿜어내 관객들로 하여금 집에 선글라스를 두고 온 것을 후회하게끔 만들 정도로 눈부시게 빛을 발하고 있다. 파리에서 가장 오래된 다리 퐁 뇌프는 토목공이 아닌 화가의 손에 의해 '새로운 다리'로 거듭난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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