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명과 정절 사이에서 갈등하는 밧세바

       인류 역사상 가장 많이 팔린 책이 성경이라고 한다. 굳이 기독교 신자가 아니어도 성경의 얘기는 재미있다. 특히 예수 이전 구약의 이야기는 구수한 옛날 이야기의 느낌도 있다. 서양문명의 두 수레바퀴가 헬레니즘과 헤브라이즘이듯 성경의 이야기는 그리스 신화와 더불어 서양화의 가장 중요한 소재가 되었다. 거인 골리앗을 돌팔매로 쓰러뜨리고 조국을 위기에서 구한 소년 영웅 다윗은 후에 이스라엘의 왕이 된다. 그런데 다윗도 왕이 되기 전의 행적과 왕이 된 후의 행적이 차이가 많아 역시 초심을 지키지 못했음을 알 수 있다. 그의 행실 이야기를 그린 네덜란드의 거장인 렘브란트(Rembrandt, 1606-1669)의 `목욕하는 밧세바'(Bathsheba Bathing, 1654년)가 오늘 감상할 그림이다.
우연히 궁전 테라스에서 밧세바(Bathsheba)의 목욕 장면을 엿보고 미모에 반한 끝에 흑심을 품게 된 다윗왕. 일설에는 밧세바가 왕을 유혹하기 위해 일부러 그런 것이라는 이야기도 있지만 당시 밧세바는 우리야(Uriah)라는 장수를 남편으로 둔 엄연한 유부녀였다. 다윗은 우리야를 전장에 투입하려는 얕은 꾀를 짜내게 된다. 홀로 남은 밧세바에게 다윗은 `야밤에 왕궁에서 만나자'는 전갈을 띄워 사단이 벌어지게 된다. 지금 밧세바는 왕의 서한을 받고 왕을 만나러 가기 위해서 몸단장을 하는 중이다. 막 목욕을 마친 밧세바의 발치에는 하녀가 발을 씻기고 있는데 밧세바의 손에는 편지가 쥐어져 있다. 바로 만남을 청하는 왕의 편지이며 거역하기 힘든 명령이기도 하다. 렘브란트는 이 작품에서 왕의 편지를 받고 혼란스러워하며 고민하는 모습으로, 피해자인 동시에 죄인이 되어버린 밧세바를 표현하고 있다.

      이 그림은 보다시피 매우 사실적인 누드화이다. 그런데 전혀 관능적이지 않다. 왕이 반할 정도의 미모를 가진 여인의 누드를 만났을 때 우리가 은근히 기대하는 `예쁜 여자의 벗은 몸을 보는 속된 즐거움’을 느끼기 힘들다. 그 이유는 바로 밧세바의 내면의 갈등이 어둡게 그림을 지배하고 있기 때문이다. 아름다운 벗은 몸이 아니라 왕명과 정절 사이의 갈등이 이 그림의 참된 주제이기 때문이다. 중년을 바라보는 여인의 풍만한 나신의 농염함은 여인의 가라앉은 품위에 눌려 있다. 그런데 이 여인의 기품있고 잘생긴 얼굴에는 수심이 가득하다. 이는 이 작품이 기쁨보다는 슬픔에 초점을 맞춘 작품이기 때문이다.
밧세바의 모델은 렘브란트의 사실상 두 번째 아내인 헨드리케라고 전한다. 헨드리케는 렘브란트의 첫 아내였던 사스키아가 죽은 후 가정부로 들어왔다가 렘브란트와 사랑을 하게 된 여인인데 렘브란트는 첫 아내의 유언 때문에 다시 정식 결혼을 할 수가 없는 처지였다. 이들의 관계는 불륜으로 매도되었고 급기야는 종교재판에까지 회부되어 사회적으로 거의 매장 당하는 등 마음 고생이 심했던 처지였다. 이 그림에는 헨드리케의 그런 마음 고생이 밧세바의 갈등과 방황이라는 포장을 빌어 생생하게 표현되었다. 이 작품은 ‘빛의 마술사’라고 불리는 렘브란트의 그림답게 명암의 대비가 뚜렷하고 빛의 처리가 독특하다. 빛은 밧세바의 벗은 몸에 눈부시게 집중되고 있고 주위의 배경은 너무 어두워 발을 씻기는 하녀도 자세히 보지 않으면 지나칠 정도이다. 밧세바의 자세는 고대 조각과도 닮았다.

       결국 밧세바의 남편인 우리야는 전장에서 전사하게 되고, 다윗 왕은 밧세바를 자신의 아내를 맞는다. 그러나 이로 인해 하나님은 이 죄많은 남녀에게서 태어난 첫번째 아들을 비명횡사하도록 하는 벌을 내렸다. 이렇듯 잘못된 사랑은 빛이 아니라, 어두운 그림자로 남는다. 렘브란트는 밧세바의 몸에 밝은 빛을 내리는 한편, 주변을 어둡게 처리해 여인의 아름다움과 그가 맞닥뜨리게 된 고통을 함께 보여주고 있다. 그 빛과 그림자의 대립에는 다윗 왕의 영광과 어리석음이 함께 어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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