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 속에서 생명력을 머금은 걸작 르느와르의 <책 읽는 소녀>

르느와르 <책 읽는 여인>, 1875-1876, 캔버스에 유채, 프랑스 오르세 미술관소장 .

 

       누구에게나 인생을 살면서 결정적인 순간들이 찾아온다. 첫눈에 반하는 반려자를 만나게 되는 우연도 그럴 것이고, 평생을 함께 할 내 천직을 찾게 되는 일도 이에 속한다.
20세기 프랑스의 대표 인상파 화가인 피에르 오귀스트 르느와르(Pierre-Auguste Renoir, 1841-1919)는 평생 화가의 길을 걷게 하는 순간을 13세 때 만났다.
어려운 가계에 보탬이 되고자 13살의 어린 나이에 시작한 도기 공방 일이 그것이었다.
처음에는 도기의 윗그림 그리기로 시작했지만, 몇 년 뒤 공방에서 일자리를 잃게 되자 화가가 되기로 결심하고, 20세에는 국립미술학교에 들어가 정식으로 그림을 배우게 된다. 우연히 발견한 예술을 향한 그의 열정은 예순에 이르러 관절염으로 그림을 그리기 힘들게 된 처지에도 계속되었다.
급기야 손에 붓을 묶어놓고 그림을 그릴 정도의 부자유스러운 몸이 됐지만, 불구의 몸은 그의 의욕을 꺾지 못했고, 지금도 몇 손가락 안에 꼽히는 다작 화가로 불리게 됐다.
르느와르의 풍경이나 정물도 훌륭하지만, 널리 알려진 걸작 속에는 여인과 어린이, 나체가 등장한다. 미묘하게 섞인 색채를 통해 그림 속 대상이 살아 움직이는 것처럼 보이게 하는 표현법은 여러 작품 속에서 일괄적으로 엿볼 수 있다.

     서른 중반의 르느와르가 그려낸 <책 읽는 소녀>는 그의 화풍을 보여주는 대표작으로, 인물을 중심으로 빛을 탐색하는 특징이 잘 드러난다.   독서 삼매경에 빠진 소녀의 모습은 창밖에서 흘러 들어오는 부드러운 햇살과 어우러져 절묘하게 포착되어 있다.
르느와르는 작품 속에서 창 밖에서 흘러 들어오는 부드러운 햇살을 받아, 역광 속에 있는 젊은 여인의 즐거운 독서의 한 순간을 잘 잡아내고 있다. 책에서 반사된 붉은 빛이 소녀의 얼굴에 비치고 있는데, 얼굴의 미세한 살결과 빛이 어우러져 있고, 전체적으로 소녀의 얼굴에서 느껴지는 활기와 자연스러움이 시선을 끈다.
르느와르는 다양하고 미묘한 색조들을 표현하는데, 책에서 반사된 빛은 얼굴의 그림자를 투명하게 만들고 있으며, 머리는 마치 스스로 빛을 뿜는 것처럼 빛난다. 여인의 얼굴은 밝은 빛의 반영으로 매혹적인 생명력을 느끼게 한다.
빠른 붓질로 턱의 형태가 나타나고, 곡선은 입술과 눈, 눈썹 등 화면의 여러 곳에서 반복된다. 붓의 터치면에서는 어떤 곳에서는 물감을 두껍게 발라 놓기도 하고, 또 다른 곳에서 단순하게 씻어 내리며 자연스러운 필치를 보이고 있다.

      빛과 책 속 이야기에 둘러싸여 충만해진 소녀의 감정이 작품 속에서도 그대로 묻어나는 듯 하다.
르느와르의 작품 속 빛은 인물을 더욱 두드러지게 하는 마력이 있다. 오죽하면 생명감이 느껴지는 작품 속 소녀의 얼굴을 보고’빛을 머금은 살결’이라는 평이 나올까.
이 그림의 실제 모델인 마르고라는 소녀는 몽마르트 근처의 거리에서 품을 팔던 어려운 처지의 소녀였다. 청소와 심부름 등 닥치는 대로 일을 하던 소녀가 어려운 환경에서도 틈틈이 독서를 하는 모습을 보고 그녀를 모델로 청했다고 한다. 작품 속에서 소녀는 다갈색의 곱슬머리, 성긴 눈썹, 속눈썹이 드문 붉은 빛의 눈, 비교적 넓은 코, 토실토실한 뺨, 그리고 도톰한 입술과 약간은 조롱하는 듯한 분위기의 미소 등의 특징을 보여 주고 있다.이 작품 속의 소녀는 이 작품 외에도 르누아르의 <춤추는 여인(La danseurse)>에서 등장하기도 한다.
힘겹게 살아가는 소녀에게 책은 좋은 친구이자 스승, 미래의 꿈을 꾸게 하여준 삶의 동반자가 아니었을까. 독서로 충만해진 소녀의 감정이 그림 속에도 그대로 묻어나는 듯하다. 이 소녀는 책을 읽으며 어떤 세상을 꿈꾸고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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