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를 쓰면서 그 동안 많은 사람들이 거론되었다. 물론 칭찬을 받았던 사람들도 있지만, 주로 부작용은 고발성 기사의 주인공에게서 발생한다. 기사가 나간 뒤 이 주인공들의 반응은 크게 두 가지였다. 첫 번째는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고 새롭게 살겠다면서, 좋은 일하면 인터뷰 기사를 그때 다시 써달라는 것이었다. 두번째 경우는 자신의 행동을 반성하지 않고, 앙심을 품고 온갖 거짓말과 욕설에, 열심히 주변 사람들을 자기 편으로 포섭하고 다니는 부류였다. 처음에는 ‘이 작은 동네에서 누구를 기사화 한다’는 것은 동네 정서에 맞지 않다는 얘기도 들었다. 하지만 심각한 잘못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이를 너무도 너그럽게 용서하는 그런 분위기는 이 곳 덴버를 무슨 짓을 해도 상관없는, 대충대충 넘어가는 동네로 만들어버렸다. 또, 이를 수수방관하고 있는 지역 언론사에게 던지는 독자들의 시선은 ‘언론은 무슨… 광고에나 집착하는 개념 없는 찌라시’라는 이미지가 되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필자도 모른 척하고 넘어가고 싶었던 일들이 많았다. 문제가 될 만한 기사는 일단 피하고, 논란거리가 되지 않는 기사만 적으면 되는 것이다. 한 동네에 살면서 안면 있는 사람들을 신문 지면에 올려 공개적으로 망신을 주는 것이 썩 내키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콜로라도 동포들의 뇌리에 박혀있는 ‘개념없는 언론’이라는 이미지에 포커스도 편승하고 싶지 않아 펜을 들었다. 많은 사람들이 우물쭈물 ‘Yes’라고 대답하면서 두리뭉실 넘어가려 할 때, ‘No’라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 용기를 가지는 것이 우리 언론인이 할 일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공정한 잣대를 적용해 수많은 소위 ‘까는’기사들을 작성했다.
하지만 부작용도 많았다. 얼마전 한 인사의 부정에 대한 기사가 대서특필된 뒤 당사자는 포커스를 고소하겠다면서 주변 사람들에게 으름장을 놓았다. 큰 소리를 쳐 가면서 “잘 알지도 못하면서 기사를 썼다, 기사가 잘못됐다, 가만 두지 않겠다” 는 등의 허풍이 신문사까지 입에서 입으로 전해졌다. 그 뒤 잠깐 만난 적이 있는데, 그때까지도 자신의 잘못을 반성하지 않고 신문에 사용된 단어 하나를 가지고 꼬투리를 잡고 있었다. 어떤 내용이 잘못되었는가에 대한 질문에는 제대로 답하지 못했다. 차라리 범 동포적 차원에서 잘못된 점을 과감히 인정하고, 반성하는 모습으로 사과문을 발표하고 새로운 출발을 기약하는 모습을 보이는 편이 나을 뻔했다. 피해 사실에 대한 확실한 증거가 있는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큰 소리를 치는 모습은 궁색하게 자신을 포장하려는 것으로 밖에 보이질 않는다.

      어떤 이는 신문에 기사가 나가자 마자 바로 변호사 편지를 보냈다. 정정보도할 기회와 함께 그쪽의 기사도 함께 실어주겠다고 했지만 제대로 정정할 내용조차 알려주지 않은 채 줄기차게 변호사를 이용해 협박을 해왔고, 이는 현재도 진행 중이다. 본인은 변호사에게 줄 돈 많으니, 가난한 신문사 주제에 감히 자신을 건드린 댓가를 지불해야 한다는 식이다. 결국 그 어느 국가보다도 언론의 자유가 보장되는 이 나라에서 그는 옳고 그름과 상관없이 돈 많다고 자랑하는 졸부로 밖에 보이질 않는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언론을 상대로 이런 돈 자랑질 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이 콜로라도 언론의 현주소인 것 같아 안타깝고 부끄럽기도 하다. 
또 한 번은, 덴버의 한 교회에서 벌어진 사건을 인용해 필자의 종교관을 피력한 일이 있었다. 기사가 나간 다음 날에 신문사로 걸려온 수 통의 전화를 통해 바른 말을 해줘서 고맙다는 감사의 인사를 받았다. 하지만 이에 대한 부작용도 있었다. 그 교회는 행사가 있을 때마다 광고 및 취재 의뢰를 의도적으로 피했다. 이 또한 쓴 소리한 것에 대한 부작용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과오를 인정하지 않는 모습 또한 올바른 교회의 모습이라 할 수 없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의 모임인 교회에서 사랑과 용서, 포용은 교회에서 가르쳐야 할, 아니 실천해야 할 덕목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지 배제와 배척의 모습이 언뜻언뜻 비치는 것이 마음에 걸린다.        

     이 곳 단체들에 대해 지적할 때도 반응이 남달랐다. 누구도 승자가 될 수 없었던 한인회와 노인회간의 그 분쟁, 새로운 한인회의 탄생, 한인회간의 경쟁, 노인회간의 분열, 이름뿐인 단체들의 쓸데없는 명예욕 열전 등을 동포의 한 사람으로서 바라만 볼 수 없어 적었던 기사들이었다. 이에 대한 반응도 만만치 않았다. 욕설 가득한 편지와 고래고래 지르는 고성 뒤에는 삿대질 하는 모습이 그려진다. ‘나 높은 사람 가운데 아는 사람 많다, 뒷조사 하겠다, 신문사 문닫게 하겠다, 밤길 조심해라, 너 몇 살이냐, 변호사 준비해라’등의 막장 대화들이 난무한 적이 한 두 번이 아니다. 이 또한 바른 말 한 것에 대한 부작용으로 볼 수 있다.
이런 부작용들 때문에 신문 만드는 일을 그만 하고 싶었을 때가 더러 있다. 하지만 격려 차원에서 매주 전화를 걸어오는 열혈 독자, 팬 차원에서 주인 얼굴도 모르는 외국식당 광고를 직접 받아 주는 독자, 행사 때마다 악수하고 싶다며 멀리서도 알아보고 뛰어오는 이런 독자들 덕분에 위에 나열한 부작용들은 오히려 부작용으로 작용하지 못하는 부작용을 낳고 있다. 도리어 억울한 심경을 토로하기 위해서 신문사를 찾은 동포들이 계속 늘어나고, 때로는 개인적인 하소연을 하기 위해 신문사 문을 두드린다. 발끈하는 이보다 칭찬하고자 하는 이들이 더 많아졌기 때문이다. 그래서 부작용을 더 이상 부작용으로 생각하지 않을 작정이다. 오히려 이런 부작용을 새롭게 도전하고, 더욱 반듯하게 잡아가는 원동력으로 사용할 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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