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끔 TV 드라마를 보면 필자는 답답함을 느낀다. 드라마에서 안방 침대는 주로 부부가 첨예한 갈등을 벌이는 무대로 묘사되기 때문이다. 서로 악쓰고 다투다가 휙 등을 돌리고 이불을 뒤집어쓰면 다른 한 명은 한숨을 푹 쉬고 침대에서 벌떡 일어난다.
침대는 흔히 불륜을 다룬 드라마에서 부적절한 관계의 남녀가 애정행각을 벌이는 무대로 등장한다. 사랑하는 부부의 이상적인 애정 표현이 이뤄지는 공간으로 침대가 묘사되는 것은 찾아보기 힘들다. 고작해야 신혼부부의 침실 정도일까? 대부분의 우리나라 드라마에선 부부는 그 소중한 침대를 젖혀두고 그저 거실의 탁자에 옹기종기 둘러앉아 대화를 나눈다. 물론 그것도 정겨운 모습이긴 하지만 부부의 애정과 감정 표현은 침대에서 더 자연스러울 수 있다. 굳이 서양의 드라마와 비교하자면 그들은 정해진 시간에 아이들을 그들 방에 따로 재우고 부부의 침실로 돌아와 둘이 이러쿵저러쿵 대화하거나 책을 읽거나 애정을 나누는 장면이 너무나 익숙하다. 무조건 서양문화가 더 낫다는 말은 아니다.
하지만 우리 문화는 여전히 성에 관한 한 이중성을 갖고 있다. 성을 드러내는 것을 어색해하고, 또 한편으로는 ‘숨어서’ 극단적인 쾌락을 추구한다. 어쩌면 그게 한국 부부들이 처해 있는 암울한 현실인지도 모르겠다. 그런 현실이 드라마의 제작에도 영향을 미치는 듯하다.
부부가 침대를 잠자고 섹스할 때만 이용한다면 잘못된 것이다. 부부에게 있어 침대는 서로 대화하는 무대이자 즐거우면서, 때로는 유치한 놀이터여야 한다. 아주 은밀한 일이 벌어지는, 아무도 (심지어 아이도) 간섭할 수 없는 부부만의 비밀공간이 돼야 한다. 그런 와중에 회사일, 아이 문제, 집안의 갈등 등을 접어두고 아주 평화롭고 이완된 상태로 ‘세상이 어찌 돌아가고 아무리 고되더라도 우리 둘은 소중해, 같이 있는 게 편해’라는 감정적 친밀감을 함께 느끼는 것은 좋은 청량제가 될 수 있다. 여기에 가끔 자연스러운 성 욕구를 보태서 성행위로 적절한 쾌감을 만끽하는 것은 어떤 황제의 휴식보다 더 나은 일이다.
부부의 침대에 하나를 더 보탠다면 ‘다양성’이다. 중국 베이징의 자금성에는 청나라 건륭제의 침대가 놓여 있다. 119마리의 용이 조각되어 있는 황제의 침대 위에는 ‘날로 새로워진다’는 ‘우일신(又日新)’이라는 글귀가 적혀있다. 물론 황제는 나름대로 다른 뜻이 있었겠지만, 성의학자인 필자의 관점에서는 바로 성생활에 날로 새롭게 변화를 준다는 성적 다양성(diversity)이라고 확대 해석하고 싶을 정도다.
성관계에 가벼운 변화를 의미하는 성적 다양성은 색다르고 엄청난 이벤트를 만들란 소리가 아니다. 실제 성행위 시 자극하는 부위를 조금씩 바꾸고, 어떻게 자극할지, 어떤 순서로 자극할지, 체위를 어떻게 바뀌어볼지, 어떤 공간에서 성행위를 할지 등등 사소한 변화에도 다양성은 커진다. 한마디로 성적 즐거움의 신선도를 유지하려면 변주곡이 필요하지 곡 전체를 다시 쓰거나 연주단원까지 바꿀 필요는 없다.
부부의 침대가 고가의 사치품이 되어야 분위기가 조성되는 것은 아니다. 누구에게도 침범 받지 않고 평화로운 여유를 나눌 수 있는 침대라면, 또 여기에 성적 다양성까지 보태진다면 어떤 황제의 침대보다 우리 부부의 침대가 더 값어치가 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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