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비주인과 노비를 차별한 형법

    조선시대에 노비가 전체 인구에서 차지한 비중은 보통은 40~50%, 적어도 30%는 됐다. 이 정도로, 노비는 매우 흔한 존재였다. 관청에 얽매인 공노비(관노비)를 제외하면, 대부분의 노비들은 주로 주인의 농토에서 일했다. 주인집에서 집안일을 하는 사노비(개인 소유 노비)들도 있었지만, 사노비의 대부분은 주인의 농토에서 일하고 수확물의 일부를 바치는 사람들이었다.
지주의 입장에서는 양인(자유인)에게 소작을 주기보다는 노비에게 소작을 주는 편이 훨씬 더 유리했다. 그래야 통제가 수월했다. 그래서 조선시대에 농토에서 일하는 사람들의 상당수는 바로 노비였다. 그러므로 노비는 농업경제 시대의 가장 일반적인 노동자였다.

    노비가 가장 대표적인 노동자였기 때문에, 국가권력은 어떻게든 노비를 고분고분하게 만들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런 고민을 해결하기 위한 방안 중 하나가 노비에 대한 형법적 차별이었다. 노비와 주인(노비주) 간에 형사문제가 발생할 경우에 국가는 사실상 일방적으로 주인의 편을 들었다. 노비가 형법적으로 불리한 처지에 놓이도록 함으로써 이들을 생산현장에 묶어두려 했던 것이다.
조선시대 형법은 이원적 구조를 띠었다. <경국대전>이나 <대전회통> 같은 종합법전에 포함된 형전(刑典)은 특별법의 성격을 띠었고, 중국 명나라 때의 형법인 대명률은 일반법의 성격을 띠었다. 그래서 형전에 특별히 규정된 경우가 아닌 한, 조선시대 형사 문제는 원칙상 대명률에 따라 처리됐다.
대명률에서 노비를 얼마나 차별했는지는 투구(鬪毆, 싸움과 폭행) 항목에서 잘 나타난다. 이에 따르면, 주인은 노비를 폭행해도 아무런 차별을 받지 않았다. 다만, 폭행으로 인해 노비가 사망했을 경우에만 주인은 처벌을 받았다.

    그러나 노비를 폭행하기 전에 관청에 신고를 했다면, 폭행이 사망으로 연결됐을지라도 주인은 처벌을 받지 않았다. 하지만, '관청에 신고를 해야 한다'는 요건은 그리 엄격하게 요구되지 않았다. 신고 없이 노비를 죽여도 처벌을 면하는 사례가 많았다.
대명률에서 노비가 주인을 때려죽인 경우에는 폭행과 사망 사이에 인과관계가 있든 없든 살인죄의 책임을 물은 데 반해, 주인이 노비를 때려죽인 경우에는 폭행과 사망 사이에 인과관계가 있는 경우에만 법적 책임을 물었다.

    주인이 노비를 때려죽인 경우에는, 노비의 사망이 주인의 폭행에 의한 것이었는지를 매우 엄밀히 따졌던 것이다. 따라서 관청에 신고한 상태에서 노비를 때려죽이거나, 노비가 자신의 폭행이 아닌 다른 원인에 의해 사망했다는 점이 인정되면 주인은 형사책임을 면할 수 있었다. 주인은 요리조리 빠져나갈 구멍이 많았던 것이다. 그래서 주인은 말 안 듣는 노비를 마음대로 다룰 수 있었다.
더욱 더 황당한 것은, 이런 특권이 주인뿐만 아니라 주인의 친척에게도 인정됐다는 점이다. 주인의 부모, 조부모, 외조부모, 백부모, 숙부모 등이 노비를 때려죽인 경우에도 똑같은 특권이 인정됐다. 그러므로 노비는 '사장님'은 물론이요 '사장님 친척'의 신경도 건드리지 말아야 했다.
반면에, 노비가 주인에게 위해를 가할 경우에는 법적인 응보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대명률에 따르면, 노비가 주인을 폭행하면 참형이 기본이었다. 목을 베는 형벌이 기본이었던 것이다.
고의로 주인을 살해하면, 사지를 찢는 능지처참형에 처해졌다. 고의 없이 과실치사로 죽이면 교수형에 처해졌다. 주인의 부모, 조부모, 외조부모, 백부모, 조부모를 폭행하거나 살해하거나 과실치사한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이랬기 때문에 노비는 주인은 물론 그 친척의 몸에도 일절 손을 대지 말아야 했다. 설사 장난으로 툭 쳤다 해도, 까닥하면 폭행죄로 몰려 참형을 당할 수 있었다. 그래서 주인에게 대드는 것은 대역죄와 다를 바 없었다. 그러니 주인이 아무리 부당한 노동조건을 부과한다 해도, 웬만하면 그냥 참는 수밖에 없었다. 참을 인(忍)은 노비들을 위해 준비된 글자였다.
노비주의 이익을 대변하는 국가권력은 이런 법적 장치를 통해 노비들을 고분고분하게 만들고 그들을 생산현장에 묶어두고자 했다. 그래서 조선시대에도 국가권력은 절대로 '을'의 편이 아니었다. 국가권력은 전체 '갑'의 공동 관심사를 처리하는 위원회에 불과했다고 말해도 과언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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