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에 폐주(廢主)라는 개념 속에는 '주상 자리에서 폐위된 사람'뿐만 아니라 '전직 주상의 대우를 못받는 사람'이란 뜻도 포함되어 있었다. 전직 주상이 받는 대우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죽어서 종묘 사당에 모셔지는 것이었다. 종묘 사당에 모셔져서 조(祖)나 종(宗) 같은 묘호(사당 명칭)를 받는 것이 전직 주상 대우의 완성이었다.
광해군과 연산군이 폐주 소리를 듣는 본질적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임금 자리에서 쫓겨났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종묘에 모셔지지 못했기 때문에 그런 소리를 듣는 것이다.  
오늘날에는 '전직 대통령의 예우에 관한 법률'이 정한 바에 따라 전직 대통령을 예우한다. 그런데 지난 1995년에 전두환 전 대통령을 12?12 군사반란죄, 5?18 내란죄, 불법 비자금 조성 등의 혐의로 구속함으로써, 대한민국 국민들은 전두환을 전직 대통령으로 예우하지 않겠다는 결단을 표시했다. 1997년에 추징금 징수를 제외한 분야에서 전두환을 사면하기는 했지만, 그에게 전직 대통령 예우를 하지 않겠다는 국민의 결단은 크게 변하지 않았다. 그러나 전두환은 '폐주'처럼 살기는커녕 '상왕'처럼 호사를 누리고 있다. 폐주 전두환의 화려한 삶을 조선시대 대표적 폐주인 광해군의 초라한 삶과 비교해보면, 폐주 전두환이 얼마나 몰염치한 인물인지 다시 한 번 절감하게 될 것이다.

   광해군은 전두환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큰 그릇이었다. 이 글에서 광해군과 전두환을 비교하는 것은, 광해군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하급 인물'이 광해군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상층 생활'을 누리는 것이 얼마나 모순되고 서글픈 일인지를 강조하기 위해서다.
인조반정, 즉 쿠데타로 왕권을 잃은 뒤 광해군은 처음에는 강화도에서, 나중에는 제주도에서 유배 생활을 했다.
반정(反正)이란 것은 '올바른 상태로 되돌리다'란 의미다. 이것은 광해군의 조세 개혁과 자주 외교가 옳지 않았다는 전제 하에서 나온 표현으로, 광해군을 폐위시킨 쿠데타 세력의 관점에 입각한 것이다. 그래서 이 글에서는 인조반정 대신 인조 쿠데타란 표현을 사용하기로 한다. 
광해군은 1623년부터 1641년까지 18년간 유배생활을 했다. 15년간의 임금 생활과 비교하면, 유배 생활이 3년 더 길었다. 이 기간 동안에 그는 참으로 말 못할 수모와 고통을 겪었다.
광해군은 숙박 문제에서부터 수모를 당했다. 인조 2년 6월 3일자(1624년 7월 17일) <인조실록>에 따르면, 광해군을 강화도에 끌고 간 군관인 홍진도는 동료들과 함께 안방을 차지하고 광해군에게는 마루방을 주었다. 난방 시설인 구들이 없고 그냥 마루만 깔린 곳에 광해군을 밀어 넣은 것이다.
이 정도였으니, 광해군이 유배지에서 물질적으로 얼마나 궁핍했을지 짐작할 수 있다.
이런 상태에서 광해군은 아들 부부가 자살하고 부인이 화병으로 세상을 떠나는 슬픔까지 겪어야 했다. 이런 상황 속에서도 광해군은 자신의 처지를 담담하게 받아들였다. 남을 원망하지 않고 스스로를 탓하며 유배생활에 적응하고자 한 것이다.

   아내와 사별한 직후에 광해군은 제주도로 이송됐다. 그런데 광해군은 제주도에서 참으로 못된 궁녀한테 정신적으로 시달렸다. 이 궁녀가 너무 모질고 건방지게 대하자, 한번은 광해군이 그 궁녀를 꾸짖은 일이 있었다. 그러자 궁녀는 광해군을 '영감'이라고 부르면서 광해군에게 일장 연설을 해댔다. 길고 긴 훈계를 한마디로 정리하면 "높은 자리에 있을 때 잘했으면 이런 일을 겪지 않지"라는 것이었다.
새로운 세상을 꿈꾸었지만 힘이 없어 왕위를 빼앗긴 광해군은 18년 동안 치욕과 고통 속에서 유배생활을 했다.
그에 비해 전두환은 1988년 퇴임 이후는 물론이고 1997년 석방 이후에도 마치 상왕이나 태상황이라도 된 것처럼 유세를 부리면서 부귀영화를 누리고 있다. 게다가 그는 자신이 얼마나 많은 죄를 지었으며 얼마나 많은 책임을 져야 하는지를 잘 모르고 있는 듯하다.
전두환은 폐주처럼 참혹하고 참담하게 살아야 한다. 그는 자신이 광해군보다 호사를 누리고 있다는 사실에 대해 죄책감을 느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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