급한 성격 때문에 의거 성공?

   3월 26일은 안중근 의사의 순국 103주년이 되는 날이다. 안중근은 1909년 10월 26일 하얼빈역에서 이토 히로부미(이등박문)의 목숨을 거두고 붙잡힌 뒤, 5개월 뒤인 1910년 3월 26일 여순(뤼순) 감옥에서 일본제국주의에 의해 살해(사형집행)당했다.
자서전인 <안응칠 역사>에서 회고한 바와 같이, 안중근은 1894년에 아버지와 함께 동학농민군을 진압하는 데 가담했다. 참고로, 응칠(應七)은 안중근이 성인식(관례) 때 받은 이름인 자(字)다. 배와 가슴에 검은 점이 일곱 개 있다고 해서 그런 '자'를 받았다.
이토 히로부미는 일본제국주의의 상징적 인물로서, 동아시아 변방이었던 일본을 세계 정상급으로 끌어올린 인물이다. 일본은 그의 주도 하에 오키나와왕국을 강점하고 청일전쟁, 러일전쟁에서 승리를 거둔 뒤 조선의 외교권을 강탈했다.

   특히 1904~1905년 러일전쟁에서 일본은 이토 히로부미의 주도 하에 세계 최강 러시아마저 격파했다. 이 정도면, 일본 근대사에서 이토가 차지하는 비중을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 이토 히로부미를 쓰러뜨리고 일제의 발악에 경종을 울린 인물이 서른한 살 청년 안중근이다. 무명의 조선 청년이 제국주의 일본의 기수에게 일격을 가했으니, 다윗이 골리앗을 무너뜨린 일을 연상케 할 만하다. 한 인간을 평가할 때는 최후의 모습을 우선적으로 고려해야 하므로, 안중근은 동학전쟁 당시의 행적에도 불구하고 한국 근대사의 영웅으로 칭송되기에 충분하다.
안중근이 이토 히로부미의 목숨을 거둘 수 있었던 것은 일차적으로는 강렬한 민족주의 정신 때문이었고, 이차적으로는 의협심과 사격 솜씨 때문이었다. 이런 요인들과 함께, 거사 성공에 크게 기여한 또 다른 요인이 있다. 그것은 그의 급한 성격이었다.
거사 직전까지도 안중근은 이토 히로부미에 대한 정보가 별로 없었다. 10월 26일 아침 하얼빈역에 도착한다는 점만 알고 있었을 뿐이다. 그런데 진짜 중요한 것을 빠뜨렸다. 이토의 얼굴을 사전에 확인해두지 않은 것이다. 급한 마음에 안중근은 이토 히로부미의 얼굴을 모르는 상태에서 하얼빈에 갔다.
안중근은 10월 26일 아침 7시에 하얼빈역에 도착했다. 역은 아침부터 러시아 군인들로 북적거렸다. 그는 역전 다방에 들어가서 차를 두어 잔 마시면서 '손님'을 기다렸다.

   <안응칠 역사>에 따르면, 이토 히로부미를 태운 특별열차는 오전 9시 하얼빈역에 도착했다. 군악대 소리가 울려 퍼지고 기차 안에서 사람들이 나왔다. 이 장면을 본 안중근은 찻집을 나와 역 앞으로 전진했다.
기차에서 나온 이토 히로부미 일행과 안중근의 거리가 열 걸음 정도 됐을 때였다. 그때까지도 그는 이토의 얼굴을 전혀 몰랐다. 그래서 그는 맨 앞의 사람을 이토로 단정하고 네 발의 총알을 발사했다. 이렇게 많은 총알을 발사한 것은 이토의 모습을 몰랐기 때문이다. 확실하게 해두자는 차원에서 그렇게 했던 것이다.
그런데 맨 앞의 사람에게 네 발을 쏘고 난 뒤, 그는 걱정이 들었다. "생각해보니 의심이 머릿속에서 일어났다. 내가 본시 이토 히로부미의 모습을 모르고 있었기 때문이다"라고 <안응칠 역사>에 기록되어 있다. 그래서 그는 혹시나 하는 마음에, 그 사람의 뒤쪽을 향해 세 발을 더 발사했다. 자신의 급한 성미 때문에 일을 그르쳤을까봐, 확실히 하고자 세 발을 더 쏜 것이다.
그런데 처음 네 발 중에서 세 발은 이토 히로부미에 정확히 명중했다. 누군지 모르고 쐈지만, 그게 이토였던 것이다. 그 네 발 중에서 네 번째는 이토의 뒤에 있던 일본인을 쓰러뜨렸다. 나중에 쏜 세 발 중에서 두 발도 일본인들을 쓰러뜨렸다. 이렇게 해서 이토 외에 일본인 3명이 중경상을 입었다.
이토 히로부미가 세 발이나 맞고 확실하게 쓰러진 것은 안중근의 성격 때문이었다. 성급한 성미 때문에 혹시라도 실수하지 않았을까 하는 걱정이 결정적인 순간에 안중근을 신중하게 만들었고, 이것이 그의 의거를 성공으로 이끈 요인 중 하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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