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기나는 편지 / 한용구 목사

    안산 제일교회 원로이신 고훈 목사님의 시입니다. 제목이‘목회일기 25’인데요. 이런 글이 먼저 소개되어 있습니다. 일제시대 경상도 의령 지역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시골교회에 목사님이 부산에서 교회를 방문했는데, 점심식사 때라 영수부인(그러니까 당시 초대교회에서는 조직이 갖추어지지 않아서 목사님들이 각 교회에 다 계신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영수라는 직임으로 교회를 맡아 돌보게 했던 사람이 있었던 모양입니다.) 그 영수의 부인이 목사님이 오셨으니 숨겨둔 양식으로 겨우 밥 한 그릇 지어 상을 차린 겁니다. 그걸 보던 5살 난 아들이 와서 밥 달라고 조르는 겁니다. 여분이 없으니 목사님 잡숫고 남으면 주겠다고. 그럼 다 드시면 어쩌냐고 5살 철 없는 아이가 엄마에게 떼를 씁니다.
 

    목사님은 점잖으신 분이니 잡숫다 남기실 거라고 살살 달랬는데, 이 아이가 그 말을 철썩같이 믿고 기다렸습니다. 그런데 목사님은 시장하셨던지 밥에다 물까지 말아서 다 잡수어 버렸습니다. 그것을 보고 있던 아들이 울면서 부엌에 오더니 “엄마! 목사 저 새끼가 밥에다 물까지 말아 다 먹어 버렸어. 밥줘! 나 밥 줘~ 응! 응! 응!” 엄마는 아이 입에 치마를 말아 넣고 책망하며 함께 울었습니다. 이런 글 밑으로 시를 적어 놓으셨습니다.
  일본에 공출로 양식은 모두 빼앗기고 보릿고개마저 넘던 시절 / 우리 어머니들은 아이들에게 밥은 배불리 먹이지 못했으나 눈물양식과 더불어 / 신앙을 먹였습니다. 그때 배고픈 신앙 먹고 자란 아이들이 지금은 50대 60대가 되어 한국교회를 어깨에 짊어지고 오늘의 축복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 우리들은 우리 자식들에게 먹을 것을 넘치도록 먹이나 신앙의 배는 골리고 있습니다. 먼훗날 / 우리 후손은 / 무엇을 거둘른지....  

대를 이어 신앙을 유산으로 물려 준다는 것은 하나님 나라에서는 얼마나 귀한 일인지 모릅니다. 오늘 본문 말씀에서 우리가 살펴 볼 인물이 그런 사람입니다. 아브라함, 이삭, 야곱을 이어 4대째 신앙을 유업으로 이어받은 요셉이란 사람 말입니다. 성경은 이 요셉이란 사람을 말할 때 늘 이렇게 말합니다. 창 39장 2절과 23절 말씀을 보십니다.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시므로 그가 형통한 자가 되어 그의 주인 애굽 사람의 집에 있으니” “간수장은 그의 손에 맡긴 것을 무엇이든지 살펴보지 아니하였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심이라 여호와께서 그를 범사에 형통하게 하셨더라” 첫 2절 말씀은 형들에 의해서 애굽에 노예로 팔려 왔을 때 하신 말씀입니다. 그리고 두 번째 23절 말씀은 억울하게 누명을 쓰고 감옥에 죄수로 잡혀 들어 갔을 때 하셨던 말씀입니다.

    과연 하나님이 형통하시다 하신 이 때에 요셉 자신도‘내 인생 참 형통하네!’이렇게 말을 했을까 그것이 궁금하지 않으십니까? 도대체 뭐가 형통하단 말입니까? 인생이 꼬이고 또 꼬여 숨도 못 쉴 정도로 고통이 이만 저만이 아니었을 것 같은데 어떻게 성경은 요셉의 이런 상황을 형통이라 말씀하시는 걸까요? 히브리어로 형통이란 말은‘찰라흐’란 단어입니다. 이 말은 밟고 건너가다. 목적지까지 성공적으로 나아가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이 요셉을 애굽의 총리로 앉히시려는 계획에 성공적으로 나아가고 있다는 말이 형통하다는 말인 것입니다. 나중에 요셉도 그렇게 말을 하지요. “나를 이리로 보낸 분은 형들이 아닙니다. 하나님이십니다”이 모든 과정에 하나님의 계획이 있으셨고, 그 깊은 뜻이 실행되는 과정이었다는 고백입니다.
 

    그래서 요셉은 어디에 있던지 성실했고, 정직했고, 하나님 앞에서 모든 일들을 주께 하듯 하며 살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정녕 실수하지 않으시는 신실하신 하나님이심을 요셉은 그의 삶을 통해 보여 주고, 성경은 이를 형통하다 하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과연 요셉처럼 형통한 사람입니까?  예~ 하나님이 함께 하시고, 우리가 하나님께 진정으로 예배드리며 산제물로 하루하루 주어진 자리에서 성실과 진실함으로 옷입고 살아간다면 우리는 무조건 형통한 사람입니다. 형편과 처지에 상관없이 우리는 형통한 사람인 것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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