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에서 살고 있는 우리 아이들이 가장 헷갈려하는 한국 명절의 날짜는 설날이 아닐까 싶다. 한 해를 시작하는 첫 날인 1월1일도 설날이고, 한 달쯤 지나서 찾아오는 음력 1월1일도 설날이라고 부르니 말이다. 그래서 우리는 신정과 구정이라는 단어를 사용해 설명해왔다. 하지만 이것 또한 영어로 설명해 주기 애매하다. 더구나 그동안 미국에서는 구정을 Chinese New Year(중국 설)이라고 말하는 것이 보편화되어 있었다. 

    사실 설 표기 논란은 매년 반복되는 해묵은 논란이다. 그런데도 고약한 입버릇처럼 잘 고쳐지지 않는 것이 현실이다. 세계적인 기업들도 마찬가지였다. 작년까지 나이키는 온라인에 '중국 설'로 표기했고, 애플도 아이폰13으로 찍은 23분 분량의 영화를 공개하면서 제목에 Chinese New Year(중국 설)이라고 적기도 했다. 글로벌 기업뿐만 아니라 국제기구 유엔(UN)마저도 설 기념 우표에 Chinese Lunar Calendar(중국 음력)이라고 적어 왔다. 

    물론 중국의 설과 한국의 설은 비슷한 점이 많다. 날짜도 같고, 제사를 지내는 풍습, 액운을 멀리하는 의미로 벽서를 붙이거나 덕담을 나누고 세뱃돈을 주는 모습도 매우 유사하다. 그래서 한국의 설이 중국으로부터 완전히 영향을 받지 않았다고 부인할 수는 없다. 이로 인해 우리 스스로도 음력설을 별생각 없이 중국설(Chinese New Year)로 말해왔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알고 보면 유래와 의미, 민속놀이 등 다른 점이 많다. 정작 중국에서는 음력 설을 ‘춘제’(春節)라고 부른다. 영어로 번역할 때도 ‘Spring Festival’이라고 표현해야 한다. 중국의 설날인 춘제는 우리의 설날과는 유래부터 의미까지 완전히 다른 명절이다. 또, 중국은 춘제에 용춤과 사자춤을 추지만, 한국은 탈춤을 추고 떡국을 먹고, 강강술래, 연날리기, 널뛰기, 윷놀이, 제기차기, 팽이치기 등의 우리만의 고유 민속놀이가 있다. 

    중국뿐 아니라 한국, 베트남, 필리핀, 몽골 등 아시아권의 대부분의 국가에서 설날을 음력으로 지내고 있기 때문에, 지금의 설은 아시아권의 보편적인 문화라고 봐야 한다. 차이니스 뉴 이어는 삐뚤어진 중화사상과 문화 패권주의적 발상이며, 주변국을 속국으로 치부하고자 하는 무언의 압박으로 불 수 있다. 중국설로 표기하면 마치 중국만의 명절로 오인할 수 있기 때문에 '중국 설(Chinese New Year)'은 명백한 오류가 있는 표현이다.  
여러 아시아 국가들의 노력으로 인해 올해부터 미국에서도 본격적으로 구정을 음력설(Lunar New year)로 부르기 시작했다. 특히 콜로라도는 올해부터 음력설이라고 부르고, 공식적으로 휴일로도 정했다. 주 정부는 코로나 팬데믹 이후 급속하게 늘어난 아시안들을 대상으로 한 혐오범죄의 방지 차원에서, 주 전역에 아시아의 문화를 널리 알리고, 그 문화를 인정하고 함께 즐기자는 의미가 담겨 있다.  이렇게 전 세계적으로 설의 명칭이 바뀌고 있기 때문에, 한국사람들 간의 설 명칭도 통일할 필요가 있다.

    구정은 일제강점기에 만들어진 이름이어서 현재 이 또한 논란이 되고 있다. 일찌감치 서양문물을 받아들였던 일본은 음력대신 양력을 사용했다. 양력 1월 1일은 '새로운 정월(1월)'이라는 의미를 담아 신정이라 부르고, 음력 1월 1일은 '오래된 정월'이라는 의미의 구정이라 지칭하면서, 당시 일본은 우리나라 전통 명절인 설을 없애려 했다. 이러한 역사로 인해 구정이라는 명칭은 더이상 사용하지 말아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졌고,  결국 구정은 1989년 공식적으로 '설'이라는 새로운 이름을 얻으면서 법정 공휴일로 지정되었다. 그래서 우리끼리 설날을 말할 때는 구정(舊正)보다 ‘설’로 말하고, 외국인들에게 소개할 때에는 중국설(Chinese New Year)보다는 음력설(Lunar New Year)을 사용하는 것이 맞다.    

    지난주 토요일 서울바베큐 주차장에서는 설을 맞아 쌀 나누기 행사가 열렸다. 새벽부터 눈이 내렸고, 행사가 진행되는 내내 바람을 동반한 눈이 계속 내렸다. 이러한 악천후 속에서도 많은 교민들이 행사장을 찾아 쌀을 받았다. 이번 행사를 위해 서울바베큐는 전날부터 만반의 준비를 한 것 같았다. 대형 텐트를 치고, 그 아래에 쌀 1천포를 쌓았고, 뜨끈한 어묵탕도 끓였다. 이종욱 사장은 추운 날씨에 고생하는 봉사자들을 위해 모닥불을 지피고, 교민들에게 쌀만 주기가 못내 아쉬웠는지, 요즘 없어서 못판다는 인기템 냉동김밥까지 덤으로 나누어주었다. 사실 덴버에 살면서 이렇게 대규모 쌀 나눔행사는 처음 보았다. 2만불이 넘는 개인 사비를 털어 이처럼 할 수 있는 단체도, 업체도, 개인도 없었다. 다시말해 이번 서울바베큐의 쌀 나눔행사의 규모는 콜로라도 한인사회 역사상 처음이었다. 손발이 꽁꽁 얼어붙은 영하의 날씨에도 불구하고 받는 사람의 얼굴에도, 주는 사람의 얼굴에도 행복이 가득해 보였다. 필자는 언론사 대표가 아닌 교민의 한사람으로서, 이렇게 푸짐한 행사를 해준 서울이 대견스럽기 그지없는 하루였다.
음력설 다음날 주류 언론에서는 아시안 커뮤니티에서 음력설을 축하하기 위해 열렸던 아시안 커뮤니티의 행사들을 일제히 보도했다. 이들은 덴버, 웨스트민스터 등에서 펼쳐진 이벤트들을 보도했는데, 베트남 사회의 소식도 짧게 전해졌지만 대부분의 분량에는 용의 탈을 쓰고 나와 춤을 추는 중국 커뮤니티의 근황이 담겼다. 불리는 이름은 음력설로 바뀌었지만, 여전히 중국 위주의 설날 행사에 집중하는 모습이다. 서울바베큐의 이벤트뿐만 아니라 한국학교나 여러 시니어센터에서 열린 설날 행사가 결코 이들의 모습에 뒤지지 않는데 말이다.

    세상이 변했고, 한국의 위상은 점점 올라가고 있다. 예전에 미처 깨닫지 못했던 이슈들이 새로운 화두로 떠오를 때가 있다. 세상이 변하면 거기에 맞춰 움직여야 한다는 뜻이다. 7백만 해외동포 시대를 맞았고 높아진 한류 위상에 걸맞게 대한민국의 홍보 프레임도 재편성되어야 한다. 그래서 공식적으로 음력설(Lunar New Year)로 부르되, 한인사회 내에서는 별도로 한국설(Korean New Year) 이라는 명칭을 불러보는 것도 좋겠다. 이러한 소소한 시도가 쌓이면, 언젠가 한국이 중국의 이미지를 넘어 설 문화를 선도하는 대표국가가 될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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