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기나는 편지 / 한용구 목사

 ◈ “길이 참으라!”야고보서 5장 7-11절

   종종 교육 대학을 다닐 때가 생각납니다. 그때 저는 핸드볼 선수 생활을 한 적이 있습니다. 서울 운동장에서도 뛰어 봤고 청주 체육관, 광주 체육관에서도 시합을 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평소에 연습하던 과정입니다. 정말 지독한 훈련을 받았습니다. 던지고 받고 슛을 쏘고, 뒹굴고 막고 뛰도 또 뛰고, 코치는 인정사정 없이 몰아 부쳤습니다. 어느 여름날, 이마가 이상해서 손 등으로 쓰윽 문질렀는데, 뭔가 두들거리는 것이 떨어졌습니다. 확실치는 않지만 그게 소금이었을까? 하는 생각입니다. 땀을 흘리고 다시 마르고 또 흘리고 마르고, 그때 처절하게 깨달았던 것이 있습니다. “연습할 때, 참지 않으면 시합에서 이길 수 없다. 연습할 때 참고 견뎌야 시합에서 승리할 수 있다.” 이 엄연한 사실을 깨닫고 또 깨달아야 했습니다. 세상에 참지 않고 되는 일이 있을까요? 꽃 한송이도, 사과 한 알도, 괜찮아 보이는 어떤 일도 반드시 누군가의 인내가 거름이 되어 있는 게 틀림없지요.

 

   우리 인생도 마찬가지지요.  지금은 기억에 없지만 어린 시절, 부모님의 수고와 희생과 인내로 말미암아 오늘 내가 여기 존재하는 것이지요.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로 구원 받은 것에 대해서도 성경은 이렇게 말씀하시지요.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그는 그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히12:2) 우리가 구원 받은 것도 바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를 참으심 때문이지요. 그 수치와 멸시를 다 참으셨기에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로 살아가는 것이지요.

 

   인생을 마감할 때, 사람들은 보통 3가지 후회를 한다고 합니다. “좀 더 베풀며 살 걸.” 나만 위해 살고 보니 의미가 없어요. 허무해요. 다른 사람을 위하여 살아야 보람이 생긱는 데요. “좀 더 즐기며 살 걸.” 이럴 줄 알았더면 괜히 걱정하고 괜히 원망하고괜히 불평하며 살았어요. 이걸 후회한다고 하지요. 셋째, 좀 더 참아 줄 걸, 좀 더 기다려 줄 걸, 너무 조급했어요. 특히 욱하고 올라오는 대로 말해 버려서 상대방의 마음을 아프게 한 적이 얼마나 많을까요? 좀 더 참아야지요. 한 번 더 기다려 줘야지요.

 

   오늘 본문은 참음과 인내의 본으로 세 사람을 예로 들지요. 첫째, 농부처럼입니다. 농부의 인내는 그냥 무조건 인내하는 것이 아닙니다. 씨앗을 뿌리놓고 열매가 맺힐 것을 참고 기다리는 인내입니다. 이건 확실한 믿음으로 참는 일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우리 마음에 씨앗으로 심어 놓고 참고 기다린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우리가 기도로 하늘나라 정원에 씨앗을 심어 놓고 기다린다면 언젠가 하나님께서 아름다운 열매를 거두게 하시겠지요. 그러니 기도는 믿음으로 해야지요. 반드시 이루어주실 줄 믿고 믿음으로 씨앗을 심어야겠지요. 둘째, 선지자처럼 인내하라입니다. 선지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명령으로 받아 그대로 전하고 순종하는 자들입니다. 호세아 선지자에게 명령하셨지요. 고멜이라는 음란한 여자를 데려다가 아내로 삼아라? 자녀 낳고 살다가 고멜이 도망가요? 다시 데려다 살아라.

   

   얼마나 힘들었을까요?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이 호세아 선지자의 삶을 보면서 하나님이 자신들을 사랑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지를 깨달을 때까지 참고 기다려야했던 것이지요. 선지자처럼 내게 주신 사명임을 알고 참고 기다리며 이루어가야할 것은 무엇일까요? 셋째, 욥처럼 인내하라입니다. 욥의 인내는 모르고 당하는 일입니다. 당대의 의인이 죄없이 참고 견뎌야하는 인내였습니다. 재산이 날아가고 자녀들이 죽고 자기 몸에 병이 들고, 그는 도저히 그 이유를 알 수 없었습니다. 다만 하나님 앞에 질문하는 일이 그의 전부였지요. 욥은 힘들 때마다 하나님 앞에 질문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정답을 얻게 되지요.


   “나의 가는 길을 나는 모르지만 그가 아십니다. 그가 나를 단련하실 후에는 내가 정금같이 나올 것입니다.” 인생은 모르고 살아갈 때가 많지요. 그때마다 욥의 인내를 기억하며 하나님께 질문하며 견딜 것입니다. 하나님께 질문하면 하나님의 정답이 주어질 것이니까요. 자, 농부처럼, 선지자처럼, 욥처럼, 우리가 만나는 일들을 잘 참고 인내하여 승리함으로 주께서 약속하신 축복을 누리시기를 간절히 소원합니다.

 

 ◈ 아빠, 찡그리지 마세요!!

   어느날 저녁, 서울에서 온 둘째가 저에게 물었습니다. 둘째는 항상 직통으로 말합니다. 돌려서 말하는 법이 없습니다. 그래서 종종 저를 공포로 몰아 넣는 딸입니다. 저를 정색하고 쳐다 봅니다.
   “아빠.”
    “왜?”
   “아빠는 왜 종종 말할 때 찡그려?”
   “그래?”
  그리고 이어서 이럽니다.
   “아빠, 아빠는 목사님인데, 말할 때 그렇게 찡그리면 성도님들이 은혜가 되겠어? 아빠가 잘 생각 해 봐.”
   “하이고, 그래? 알았어.”
  정말 뒤통수를 한 대 맞았습니다. 띵하고 소리가 나는 것 같습니다. 제가 속으로 중얼거렸습니다. ‘목사도 딸에게는 설교를 들어야 하는구나.’ 그리고 저는 나름대로 둘 째에게 설명을 했습니다.
   “나도 고치려 하는 데 그게 잘 안된다. 나도 그걸 잘 아는데, 애를 쓰는 데 잘 안된다. 알았다, 고치려고 애를 쓸께.”
  인정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딸이 그렇게 느꼈다니 어쩌겠습니까? 그리고 거울을 볼 때마다 의식합니다. 혹시나 얼굴을 찡그리는 버릇이 없는가?  아마도 어린 시절 가정이 너무 어려워서였을까요? 초등학교를 5곳이나 전학을 다녀야 했으니까요. 정말 초등학교 친구가 하나도 없습니다. 젊은 시절에 제 소심하고 소극적인 성격을 고치려고 어지간히 애를 썼습니다. 기도도 많이 했지요.
  그러다가 지금은 찾기 힘든 ‘로만 핀 센트 필’목사님이 쓴 적극적인 사고 방식이란 책을 만났습니다. 그리고 거의 날마다 그 책을 끼고 다녔습니다. 그런데도 아직도 어린 시절의 상처는 그대로 얼굴에 남아 있는가 봅니다. ‘이건 고쳐야 하는데.’ 아직도 고치면서 가야 하는 것이 인생인 것 같습니다. 누구나 비슷하겠지요. 어쨌든 고쳐야할 것을 깨닫게 해 주니 딸이 고맙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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