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자의 아버지는 말단 기능직에서부터 이사관에까지 오른, 대한민국 공무원 역사상 유일무이한 존재이다. 그가 38년간 국가를 위해 일할 수 있었고, 대한민국 훈장을 받고 명예로운 퇴직을 할 수 있었던 그 시작은 아이러니하게도 ‘가난’ 때문이었다. 필자는 아버지로부터 어린시절 다녔던 서당에 대해 여러번 들었다. 가장 재미있게 들었던 아빠의 학창시절 에피소드는 '책씻이’이었다. 동몽선습(童蒙先習)이나 명심보감(明心寶鑑)과 같은 책 한 권을 떼고 나면 책씻이를 했다. 의미상으로는 책 한권을 수료한 학생들이 선생님에게 감사의 마음을 전하는 시간이지만, 동시에 훈장 선생님이 아이들에게 문제를 내고 답을 얻는 일종의 기말고사의 의미도 있어, 긴장을 풀 수 없는 날이기도 했단다. 그리고, 사극 드라마에서 자주보는 장면인 천자문을 읽을 때는 훈장 선생님이 회초리를 들어 목소리가 작은 아이들을 노려보았다는 얘기도 재미있게 들은 적이 있다. 필자는 이때만 해도 서당은 아버지의 즐거운 어린시절의 추억으로만 여겼다. 


   이렇게 아버지의 뛰어난 한자 실력은 필자에게 큰 도움이 되었다. 고교시절 국영수도 아닌 한문 수업에 숙제가 많아서 늘 부담스러웠다. 숙제는 종이 서너 장에 빼곡히 적힌 한자의 음을 적어가는 것이었다. 그때마다 필자는 아버지의 도움을 살짝 받았다. 중요 과목의 숙제를 먼저 해야한다는 막내딸의 간청을 뿌리치지 못하는 아버지는 자주 한문 숙제를 도와주시곤 했다. 아버지는 옥편도 필요없었고 모두 아는 한자이다보니, 아버지가 한문 숙제를 도와준 날은 두시간은 일찍 잘 수 있었던 것 같다. 이때만 해도 필자는 다른 아버지들도 모두 한자를 잘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친구들과 얘기를 나누다보면 한자를 잘 아는 아버지는 그리 많지 않았다.


    지금 80세가 훌쩍 넘은 아버지에게 한자는 가난과 성공의 시간이 공존하고 있다. 아버지는 또래 아이들이 가는 평범한 중학교를 다니지 못했다. 찢어지게 가난한 집의 5남매 중 장남으로 태어나 집안일부터 동생들까지 돌보아야 하는 운명을 받아들여야했고, 초등학교 졸업 후 중학교 진학을 포기해야만 했다. 할아버지께서는 집안의 장남을 학교에 못 보내는 것이 안타까우셨는지, 아버지를 일반 학교 대신 서당에 보내셨다. 서당은 학비가 거의 들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학비는 할아버지가 곡식으로 대신하셨는데, 여름에는 보리 반 섬을, 가을에는 나락 반 섬을, 그렇게 일 년에 두 번 정도 서당에 갖다드렸다고 한다. 이렇게 아버지는 또래 아이들이 일반 중학교에서 3년을 공부하는 동안, 서당에서 그 시간을 채웠다.


    비록 가난때문에 다닌 서당이었지만, 그곳에서 배운 한문으로 인해 아버지의 인생은 대역전극을 맞이하게 된다. 군입대 직후 이병 시절, 아버지는 지금의 군 검찰인 군 범죄수사대로 사역을 나가게 되었다고 한다. 높은 사람들은 사무실에서 일을 했고, 본인에게 주어진 임무는 장작을 패는 것이었다. 밖에서 열심히 장작을 패고 있는데, 모두 외근 중인 사무실에서 전화벨이 울리고 있었다. 하지만 그 부서 소속도 아니고, 허드레 일을 하러 나온 이병이 사무실의 전화를 받는 것은 자신의 임무가 아니라고 여겨 처음에는 무시했다. 그런데 전화벨 소리는 끊어졌다가 또다시 울리기를 반복했고, 급한 일일 수 있다는 생각에 할 수 없이 그 전화를 받게 되었다. 전화를 건 사람은 본대 범죄수사대의 중령이었다. 관등성명 후 사무실에 아무도 없다는 말을 하자, 전화를 걸은 중령은 아버지에게 메모지를 가지고 와서 자신의 말을 받아 적어서 담당과장에게 전달하라는 명령을 했다. 전화를 끊고 아버지는 대충 받아적은 내용을 새 메모지에 옮겨 적으면서, 제목과 내용에 한자를 섞어서 정리해 담당과장에게 전달했다. 그 이후 아버지의 인생은 완전히 달라졌다. 


    당시 군 내부에서 보고서를 작성할 때나 혹은 행동 지침 안내 등에는 대부분 한자가 포함되어 있었다. 그런데  한자를 적절히 쓸 수 있는 군인들이 거의 없었다. 타자기도 없는 시대여서 손으로 일일이 적어야 했는데, 한자를 많이 알고 필체도 멋진 아버지는 상사들의 마음을 사로잡기에 충분했다. 그 메모지를 전달한 다음 날부터 제대할 때까지 아버지는 자대로 돌아가지 않고 군 범죄수사대에서 근무를 하게 되었다. 부서의 과장들이 대충 적어 놓은 초안 보고서에 멋진 한자를 넣어 완성시켜주기도 하고, 밤늦도록 복사나 심부름 등의 잡일을 도맡아서 하면서 부대 내에서 스스로 필요한 존재임을 각인시켰다. 매일매일 보고서를 작성하는 범죄수사대에서 아버지는 꼭 필요한 존재로 등극하게 되었다. 나중에 상사들은  서울 대전 대구 부산 등 각 지역으로 옮겨간 후에도 아버지에 대한 칭찬은 멈추지 않았다. 이들은 아버지가 제대 후에도 아까운 인재라고 여겨, 군무원으로 사회 생활을 시작할 수 있는 길을 터주었다. 그리고 아버지는 메모를 전달했던 그 분과는 돌아가시기 전까지 50여년간 인연을 이어갔다. 어릴 적 우리 형제들은 설날에 그 분께 세배를 하러 갔는데, 그때마다 그 분은“너희 아버지는 이등병에서 장군이 된 격”이라면서 늘 아버지를 자랑스러워 하셨다.  


    퇴직 후 아버지는 “가난하지 않았으면 일반 중학교에 갔을 것이고, 그랬다면 이사관까지 오르지 못했을 것”이라는 말씀을 가끔하신다. 가난해서 서당을 가게 되었고, 덕분에 월등한 한자 실력으로 군대에서 기회를 잡을 수 있었다고 말이다. 특히 학연과 지연을 중요시 여겼던 당시의 대한민국에서, 최고 학력 서당인 아버지가 말단 기능직에서부터 시작해 9급, 사무관, 서기관, 이사관에 오르기까지 38년간의 여정에는 일반 사람들의 역량으로는 상상할 수 없는 그만의 강단과 노력이 분명 있었을 것이다. 올해 아버지와 어머니가 결혼한 지 62년이 되었다. 그동안 엄마의 고생만 깊이 들여다본 것 같아 조금은 죄송스럽다. 어린시절 필자에게 아버지는 수백명을 지휘하는, 무서운 호랑이와 같아서 속마음을 표현하기 어려웠다. 그러나 이제는 필자가 어려움에 처할 때마다 가장 근접한 답을 찾아주는, 필자 인생에 확실한 길라잡이가 되어 주신다. 이번 주는 아버지의 날이 들어있다.  이 시간을 빌려 가족과 국가에 대한 당신의 노고(勞苦)와 공헌(貢獻)에 다시 한번 존경을 표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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