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동훈 더비전교회 공동담임목사

    시대가 악해질수록 사람들이 사람의 생명을 소중하게 여기지 않는 ‘생명경시 풍조’가 만연합니다. 살인과 자살에 관한 뉴스가 사회면에 차고 넘칩니다. 최근에 한국에서는 이런 살인 사건으로 사람들의 마음을 무겁게 했습니다. 부산에서 있었던 사건인데, 23세의 예쁘장한 여인이 자기 또래의 다른 여자 집을 찾아가 살해하고 시신을 잔인하게 토막내어  낙동강변에 유기했다가 붙잡혔습니다. 살인한 이유를 묻는 경찰에게 이 여인은 너무도 태연하게 “살인해 보고 싶었어요”라고 대답했습니다. 참으로 어처구니없으면서도 한 사람의 생명의 무게가 너무도 솜털처럼 가볍게 취급당하고 있음에 가슴이 섬뜩해졌습니다.   


     구약 사무엘상에도 살인을 저지르고자 하는 자와 살인해서는 안 된다고 만류하는 사람들의 대화가 등장합니다. 한 사람은 ‘아비새’고 또 한 사람은 ‘다윗’입니다. 이들은 사울 왕의 추격을 피해 십광야 속에 숨어 있었습니다. 삼천명의 군대를 거느리고 다윗의 일생들이 숨어 있는 십광야로 들어가는 입구를 봉쇄하고 진을 친 사울 왕은 진지 한 복판에서 군대에 둘러싸여 잠을 자고 있었습니다. 다윗과 아비새가 누가 떠메 가도 모를 정도로 곤히 잠들어 있는 사울의 진영을 뚫고 들어갔습니다. 잠들어 있는 사울 왕의 모습이 이들의 눈에 들어왔습니다. 이 때 아비새가 다윗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당신을 그렇게도 죽이려고 하는 당신의 원수가 여기 세상 모르고 잠들어 있습니다. 원수를 제거할 수 있는 하나님이 주신 최고의 기회 아닙니까? 당신을 대신해서 내가 이 사울을 죽이겠습니다.”라고 살인을 부추기고 스스로 살인자가 되겠다고 하는 것입니다. 아비새는 다윗의 충성스러우면서도 잔인한 부하였습니다. 그는 늘 “저놈 죽여야 합니다.” “저놈 내가 죽이겠습니다.”라는 말을 입에 달고 다윗의 부하 노릇을 했던 사람입니다.


    이런 아비새의 말에 다윗이 이렇게 반응합니다. “다윗이 아비새에게 이르되 죽이지 말라”(사무엘상26:9). 다윗의 대답은 한마디로 “그를 죽이지 말라!”라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사울 왕을 죽여서는 안 되는 이유 세 가지를 제시합니다. 첫째, “여호와의 기름 부음 받은 자를 치는 것은 죄다.”(9절)라고 말합니다. 하나님께 죄가 되기 때문에 사울 왕을 죽여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둘째, “여호와께서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하노니 여호와께서 그를 치시리니”(사무엘상26:10). 사울 왕을 죽이고 살리는 문제는 하나님의 주권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하실 일이라는 것입니다. 셋째, “여호와의 기름 부음 받은 자를 치는 것을 여호와께서 금하시나니”(사무엘상26:11) 하나님이 금하신 일이기에 사울 왕을 죽일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다윗이 사울 왕을 죽이지 말아야 하는 근거 속에는 자신의 사적인 감정이나 자신의 유익을 따라 이해득실을 따지는 일이 자리 잡고 있지 않습니다. 사울 왕을 향한 다윗의 감정으로만 놓고 보면 그를 죽일 만한 근거가 차고도 넘칩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다윗이 사울 왕으로부터 얼마나 많은 살해 위협을 당했습니까? 다윗이 사울 왕을 향한 미움의 감정에 충실해서 행동했다면 사울 왕은 이미 엔게디 동굴(사무엘상24장) 속에서 다윗의 손에 죽었을 것입니다. 이해득실의 측면에서 생각해 봐도 사울 왕이 죽으면 이 지긋지긋한 도망자 신세를 끝내고, 명실공히 이미 하나님으로부터 인정받은 차기 왕의 자리를 차지하는 일이 앞당겨지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다윗은 사울 왕을 죽이지 않습니다. 왜요? 그것은 하나님께 죄가 되기 때문입니다. 그 일은 하나님이 하실 일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하나님이 하지 말라고 하신 일이기 때문입니다. 한 마디로 자신의 손으로 사울 왕을 죽여서는 안 되는 이유는 딱 하나입니다. 무엇입니까? “여호와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이 그의 이유입니다. 다윗은 늘 철저하게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말과 행동을 결정할 줄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왜요? 하나님께서 자신의 왕이시기 때문입니다. 


    여러분들은 내가 그렇게 말하고 행동하고, 또 그렇게 살아가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하나님이십니까? 하나님보다 내 감정이 앞서지 않습니까? 이해득실을 먼저 따지지 않습니까? 늘 생각해 보고 점검해 보아야 할 중요한 문제입니다. 우리가 교회 생활 신앙생활을 이렇게 오래 하고 있어도 내 신앙이 자라지 않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하나님을 생각하고 하나님을 의식하지 않고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생각하고 의식했다 할지라도 내 감정 내 이해타산을 앞세우지 않고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라고 했다면 눈 질금 감고 손해 볼 것을 각오하고서라도 한번해 보는 경험들이 없거나 아주 작기 때문입니다. 다윗은 항상 자신의 머리 위에 하나님을 두고 그 하나님을 왕으로 섬기며 살았습니다. 자신도 한 나라의 왕이면서도 그는 하나님을 자신의 왕으로 섬겼습니다. 그래서 다윗은 이렇게 고백합니다. “왕이신 나의 하나님이여 내가 주를 높이고 영원히 주의 이름을 송축하리이다”(시편145:1). 사울 왕을 죽여서는 안 되는 이유 세 가지를 아비새에게 말하는 다윗의 모습 속에서 다윗의 이 고백이 진실임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다윗은 자신이 최종적인 권위자가 아니라는 사실을 늘 분명히 했습니다. 하나님이 최종적인 권위자였고 이유였고 결정권자였습니다. 


    여러분들은 내가 믿는 하나님을 어떤 분으로 알고 신앙생활하고 계십니까? 여러분들의 소원이나 해결해 주는 문제 해결사 정도로 여기고 있지 않습니까? 다윗처럼 여러분들의 삶의 이유, 말과 행동의 이유가 하나님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내가 오늘 호흡하는 이유도 하나님이시고, 내가 오늘 먹고 살아가는 이유도 하나님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다윗처럼 내 머리 위에 하나님을 왕으로 모시고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하나님은 왕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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