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기나는 편지 / 한용구 목사

   ◈“요셉이 꼭 필요하셨다! ”마태복음 1장 18절 25절

     성탄절이 되면 금방 떠오르는 이름들이 있지요. 우선 들에서 양을 치던 목자들이 생각납니다. 그들은 천사들의 음성을 듣자마자 아기 예수님이 태어나신 마굿간으로 달려갔지요. 그리고 메시야가 아기로 오심을 확인하고 찬양했지요. 그 찬양은 꼭 필요한 찬양이었습니다. 또 동방의 박사들, 그 멀고 먼 길을, 몇 달 동안 별을 보고 와서 황금과 유향과 몰약을 예물로 드렸습니다. 그 예물은 얼마나 요긴하게 사용됐을까요? 헤롯의 위협을 피해서 애굽으로 피신했을 때에도 비용으로 꼭 필요했을 것입니다. 마리아는 말할 것도 없습니다. 자기 몸을 희생했으니까요. 처녀가 애기를 가졌다고 하면 큰 일날 일일텐데, 어쩌면 각오를 단단히 한 것이지요. 무슨 일을 당하더라도 감당할 각오를 한 것이지요. 그런데 마리아의 남편인 요셉이 한 일은 무엇일까요? 요셉도 성자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시는 데 필요했을까요? 대답은 확실합니다. “예수님이 아기로 이 땅에 오시는 일에 요셉은 꼭 필요한 사람이었다.” 그러니까 요셉은 꼭 필요한 사람이었어요. 우리가 내 자신에 대해서도 이런 존재 의식을 가질 필요가 있습니다. “나도 주님께 꼭 필요한 존재다.” 우선 요셉은 주님과 통하는 존재입니다. 하나님과 말이 통하고 뜻이 통해요. 약혼녀가 아기를 가졌는데, 요셉은 의로운 사람이어서 가만히 끊고자 했어요. 그런데 천사가 나타나서 설득합니다. “성령으로 된 것이니 데려오기를 무서워하지 말라.” 요셉은 말씀으로 자기 생각을 고칠 줄 알았어요. 말씀 앞에 설득당할 줄 알았어요. 말씀이 그렇다고 하시면 아멘 할 줄 아는 사람이 그리스도인이지요. 요셉이 하나님을 그렇게 믿었지만 사실은 하나님이 요셉을 그렇게 신뢰하셨던 거지요.‘요셉은 내가 설득하면 아멘할 것이다.’ 요셉의 사명은 울타리가 되고 배경이 되는 사명입니다. 처녀가 아기를 가졌으니 이걸 어떻게 누구에게 설명합니까? 부모님들은 이해해 주셨을까요? 요셉이 아니면 누구도 이걸 막아 줄 수가 없었습니다. 요셉이 마리아를 데려 왔기 때문에 누구도 의심하지 않았습니다. 언젠가 예전에 아는 청년이 결혼한다고 주례를 부탁해 왔습니다. 우리교회는 다니지 않지만 사정이 딱해서 결혼식 주례를 하러 갔지요. 그런데 이게 웬일입니까? 넓은 예식장에 신랑 신부와 하객이라곤 서너명 뿐이었습니다. 정말 난감하고 허전했습니다. 그때 절감했습니다. 누군가 그냥 여기 와서 축하하는 울타리와 배경만 대 주어도 좋았을텐데. 그럼 얼마나 흐뭇한 결혼식이 되었을까? 두고 두고 안타까웠습니다. 요셉이 꼭 필요한 이유는 울타리 사명이지요. 헤롯을 피하여 애굽으로 피신해 가는 데 요셉이 있어서 아기 예수님은 안전했지요. 요셉은 자기 자지를 지킬 줄 알았습니다. 자기 자리를 알고 성실하게 지키는 일은 참으로 위대한 사명이지요. 유럽 교회가 텅텅 비었다는 소식은 어제 오늘의 이야기가 아니지요. 그 이유는 주 5일 제 근무와 여유가 생긴 사람들이 예배 시간에 성전을 지키지 않기 시작하면서 벌어진 비통한 일이지요. 예배의 자리를 지키는 것, 이것이 우리교회를 살리는 일이요. 한국교회를 살리는 일이라는 사실을 깨닫는다면, 그건 위대한 사명이 될 것입니다. 자녀들에게도 가르쳐야지요.
“네 자리를 성실하게 지켜라.” 무엇보다도 요셉은 마리아가 아기를 가진 것은 무슨 뜻이 있다고 생각하고 잘 견뎠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가져야할 해석 방법입니다. 어떤 일을 만나든지 여기엔 하나님의 무슨 뜻이 있다고 믿는 거지요. 구약의 요셉도 그랬지요. 노예로 팔려가더라도, 억울하게 옥에 갇혀도 여기엔 하나님의 무슨 뜻이 있다고 믿고 잘 참고 견뎠지요. 성자 예수님이 아기로 이 세상이 오시는 과정에 요셉은 꼭 필요한 존재였습니다. 그는 하나님과 통하는 사람이었습니다.그는 울타리의 사명을 성실하게 감당했지요. 그는 자기 자리를 정성껏 지키는 위대한 사명의 사람이었습니다. 오늘 내가 나에게 확인할 것입니다. ‘나는 하나님께 꼭 필요한 존재다!

◈인생은 그 다음이 중요하다!

우리나라 대표 지성인이라 불리우는 이어령 박사님이 굿나잇 키스라는 책을 낸 적이 있습니다. 지금은 세상을 뜨셨지요. 그 책에서 자신의 상처를 설명했습니다. 딸에 대한 참회록이고 애틋한 내용입니다. 한마디로‘딸아 아빠가 잘못했다.’입니다. 밤이 되면 어렸을 때나 어른이 되어서도 따님이 아빠 방을 열어요. 그리고 ‘아빠 굿 나잇’, 인사를 해요. 그러면 아빠인 이어령 박사는 글을 쓰느라고, 바쁘다고 쳐다보지도 않고 그냥 손 흔들며 ‘잘 자’하고 말았어요. 그런데 하늘이 무너지는 일이 벌어졌어요. 그 딸이,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만큼 이쁜 따님이 먼저 하늘나라로 가 버렸어요. 그리고 이제야 가슴을 쳐요. “왜, 아빠 굿나잇 할 때, 미소를 지으면서, 눈을 마주치며 그래 아빠도 굿 나잇 하지 못했을까?” 거기 이어령 박사님의 친필이 실려 있어요. “네 생각이 난다. 해일처럼 밀려온다. 그 높은 파도가 잔잔해질 때까지 나는 운다.” 그리고 독자들에게 당부합니다. 사랑은 지금 당장 표현해야 한다고, 나중으로 미루는 게 아니라고. 나중으로 미루면 나처럼 후회한다고. 사랑의 표현은 지금이라고. 그 책을 팔고 얻은 돈으로 따님인 이민아 목사님이 사역했던 탈북 청소년 대안학교에 다락방 도서관을 만들어 기증했어요. 이름도 ‘민아의 방’이라고 지었어요. 이어령 박사님은 문학 평론가여서 저도 지면을 통해서 좀 알거든요. 저도 다른 사람은 몰라도 이어령 박사님은 예수 안 믿을 줄 알았어요. 40대 젊은 시절에 지독한 무신론자였으니까요. 하나님이 어디 있어? 큰 소리쳤는데, 그런데 따님인 이민아 목사님의 간절한 기도 앞에 그는 무너져 버렸어요. 무너질 것 같지 않던 그의 지성이 무릎을 꿇고 말았어요. 그가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다는 소식은 정말 충격적인 일이었지요. 따님의 간절하고 절박한 기도대로 그가 예수를 믿었어요. 그의 친구들이 비웃고 조롱해도 상관하지 않아요. 나는 크리스챤이다, 고백하기를 주저하지 않았어요. 그리고 고백합니다. “우리에겐 다음이 있다.” 우리에게 다음이란 하늘나라이겠지요. 이 박사님의 다음이란 하늘나라에서 따님 만나는 그 날이 되겠지요. 그렇습니다. 우리에겐 그 다음이 있어요. 슬픔도 그 다음이 있어서 기뻐할 수 있고 절망도 그 다음이 있어서 소망을 노래할 수 있지요. 이 세상도 다음이 있어서 수고하고 희생할 수 있어요. 넘어졌다가도 다시 일어서는 이유도 다음 때문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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