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시절 군인자녀 기숙사에서 2년간 머물면서 기숙사에서 가장 가까웠던 잠실역까지 지하철을 타고 다녔다. 지방 출신 학생이 서울에서 지하철을 타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다. 복잡한 지하철 안과 수많은 출구는 늘 피곤했다. 그렇게 몇 달을 보내고 지하철 타는 것에 조금 익숙해질 무렵, 지하철 주변에서 거의 매일 만나는 아저씨들이 두 명 있었다. 이들은 동냥으로 먹고 사는 거지들이었는데. 한 명은 강변역과 잠실역을 오가는 지하철 안에서, 다른 한 명은 잠실역 출구에 가면 항상 볼 수 있었다. 물론 역 주변의 출구가 많기 때문에 다른 거지 아저씨들도 많았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필자가 기숙사로 향하는 길목은 이 두 아저씨들의 구역이었던 것 같다. 어느 날 두 아저씨들을 하루에 다 만난 적이 있었다. 학교를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지하철에서 잠깐 잠이 들었는데, 누군가 나의 어깨를 밀치듯 두드렸다. 깜짝 놀라 눈을 떠보니 지하철에서 자주 봤던 그 거지 아저씨였다. 잠이 덜 깬 나를 빤히 쳐다보던 그 아저씨는 자신의 손바닥을 보라는 눈짓을 했다. 아저씨의 눈짓을 따라 그의 손바닥을 보니 5백원짜리 동전이 수북이 쌓여 있었고 그 아래에는 천원짜리 지폐도 몇 장 보였다. 그는 돈을 주지 않으면 발을 떼지 않겠다는 심사로 내 앞에 버티고 서 있었다.  나는 깜짝 놀라 주머니를 뒤지기 시작했지만 나온 것은 회수권 서너 장이 고작이었다.  텅 빈 양손바닥을 보여주면서 돈이 없다고 표현하자 그는 ‘어이구, 돈이 그렇게 없어’ 하는 표정을 지었다. 주변 사람들의 시선은 거지보다 돈이 없는 나에게로 쏠렸다. 돈을 구걸하는 거지는 오히려 당당했고, 잔돈조차 없는 필자가 되려 민망해지는 분위기가 조성되었다.


     그리고 잠실역에서 내렸다. 지하철에서 내려 버스를 타기 위해 지나가는 지하상가에는 식당이 즐비해 있었다. 그날따라 기숙사 귀가 시간이 늦어져 서두르는 바람에 저녁때를 놓쳐 허기가 심하게 밀려왔다. 하지만 밥 사 먹을 돈이 없으니, 기숙사로 돌아가서 컵라면이라도 먹는 것 밖에 도리가 없었다. 종종 걸음으로 버스 정류장을 향하고 있는데, 한 아저씨가 식당에서 맛있게 밥을 먹고 있는 모습이 눈에 띄었다. 유리문 넘어 보이는 그의 식탁에는 순두부가 보글보글 끓고 있었고 생선 한 마리도 먹음직스럽게 놓여져 있었다. 자세히 보니 지하철 출구 계단에서 매일 자리를 잡고 구걸을 하던 또 한 명의 아저씨였다. 그는 하루를 보람차게 마치고 난 뒤 거하게 밥을 먹는, 영락없는 직장인의 모습이었다. 이 두 사람과의 만남은 필자가 기숙사를 퇴사할 때까지 이어졌다. 그리고 20여년이 훌쩍 지난 지금까지도 서울에서 만났던 그 거지 아저씨들이 돈을 받는 것에도 참으로 당당했다는 생각을 해본다.


     물론 전 세계 어디를 가더라도 거지들은 있다. 가장 기억에 남는 거지들은 학교 졸업한 후 인도로 여행을 갔을 때 만났다. 처음에는 한두명이겠거니 생각했지만 돈을 받는 걸 보는 순간  어디선가 동료 거지들이 순식간에 와르르 달려오고, 거지들로 에워싸이게 되어 꼼짝도 못하는 상황도 생긴다. 그런데 문제는 인도에서는 적선을 해도 고맙다는 소리를 듣기가 힘들다는 것이다. 그들은 상대방이 자기에게 적선을 해줘서 고마운 게 아니라, 자비를 베풀 기회를 줬기 때문에 오히려 자신들에게 고마워해야 한다고 믿는다. 또, 얼마를 주든 간에 약간의 고마움이라도 표시하면 주는 사람도 기쁘겠지만, 돈을 더 달라며 손으로 이마에 한번 입에 한번 갖다대는(뭔가 못마땅해하거나 따질때 하는 동작) 동작을 취하면서 갖가지 서글픈 표정을 짓다가 마지못해 하나를 더 주면 언제 그랬냐는 듯 무표정한 얼굴로 다른 사람을 향해 가는 경우도 있었다. 그래서 베풀고도 기분별로였던 나라가 인도였다. 이처럼 필자가 경험한 인도 거지들은 정말 당당했다. 그들은 ‘당신은 돈이 많고 자신같은 거지는 돈이 없으니, 돈 있는 당신은 나에게 돈을 줘야할 엄청난 의무가 있다' 라는 식이다.


     최근 오로라 시의회는 거지들에게 돈을 주지말라고 주민들에게 당부하는 캠페인을 전개하겠다는 계획을 가시화하고 있다. 민주당과 공화당 등 당적과 무관하게 대부분의 시의원들이 관련내용을 예비투표에서 찬성표를 던졌기 때문이다. 찬성의 이유는 두 가지로, 운전자들의 안전과 거지들의 나태한 태도로 요약된다. 캠페인에 찬성한 시의원들은 많은 거지들이 돈을 얻기 위해 위험하게 도로로 뛰어들어 교통사고가 빈번히 발생하고 있으며, 많게는 한 시간에 최고 45달러씩 버는 짭짤한 수입 덕분에 열심히 일을 하는 대신 구걸을 선택하는 거지들이 늘고 있다는데 공감대를 형성하고 있다. 실제로 요즘 오로라 길거리에는 거지들이 많이 등장했다. 신호대기 중인 차에 갑자기 달려와 창문을 두드리거나, 운전자와 눈이 마주치면 자신의 불쌍한 처지를 적은 종이를 마구 흔들고, 물을 뿌려서 차 앞 유리창을 닦기도 하고, 사거리에 자리를 잡고 앉아 좌회전 시야를 가려서 교통의 흐름을 방해하는 경우를 자주 경험한다. 


     시에서 내놓은 캠페인의 제목은 “Give Real Change”이다.  이는 잔돈(Change)이 아닌, 변화(Change)를 거지들에게 주자는 취지로, 사람들이 거지들에게 돈을 주는 대신, 이러한 거지들을 돕는 기관인 스피릿 오브 오로라(Spirit of Aurora)에게 돈을 기부해 돈이 더 유용하게 사용될 수 있도록 하자는 것이다. 물론 불쌍한 사람들에게 돈을 주거나 자선행위를 하는 것은 인류애 차원에서 필요한 일이다. 그러나 자선행위는 책임이 동반되는 행위라는 점을 명심해야 한다. 그렇기 때문에 도움을 받는 사람을 나태하게 만들어서는 안 된다. 구걸을 해서 돈을 벌 수 있다는 생활방식이 반복된다면, 삶을 개선하고자 하는 의욕은 사라질 것이다. 자신을 위해 노력하는 사람이야말로 도와줄 가치가 있으며, 그 결과는 사회의 이익으로 이어질 것이다. 손만 내밀고 기다리는 사람을 돕는 것은 자선이 아니다. 이들을 위해 사회적으로 주택, 의료, 복지 지원 등이 이루어져야 한다. 그러나 무조건적인  자선행위는 나태한 거지들만 많아지는 세상을 만들 뿐이다. 그런 의미에서 오로시의 새로운 캠페인을 적극 지지할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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