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기나는 편지 / 한용구 목사

◈ 바리새인과 세리의 차이는 !  누가복음 18장: 9절~14절 

천종호 판사님은 참 좋은 판사님이십니다. 주로 비행 청소년들을 재판하는 판사님인데, 어느땐 호통을 친다고 해서 호통 판사라고 불리우기도 합니다만 재판을 하기 전에 반드시 하나님께 기도하는 예수 잘 믿는 판사님이기도 합니다. 수많은 소년범들이 그의 판결에 감동을 받고 새로운 인생을 살아갑니다. 그런데 천 판사님이 재판을 마무리하고 판결을 하기 전에 꼭 하는 일이 있습니다. 재판 받는 소년범에게 판사님은 명령합니다.
“아버지, 어머니 사랑합니다. 10번 외쳐라.”
처음엔 어색하게 시작합니다. 그러나 반복하면서 울음이 터져 나옵니다. 그러면 부모님들은 “아들아, 딸아 미안하다.”라고 대답하면서 끌어 안고 울고, 결국 재판장은 울음 바다가 됩니다. 그러니까 천종호 판사님이 원하는 단어는 두 개지요.
‘사랑합니다. 미안합니다’
그리고 판사님은 책을 냈습니다.
“아니야 우리가 미안하다.”
틀림없습니다. 내 입 속에 ‘미안해, 미안합니다’라는 단어가 살면 그 말을 듣는 사람의 마음이 움직입니다. 눈물이 흐르고 결국 내 눈에도 눈물이 흐릅니다. 그러니 ‘미안합니다.’라는 단어는 일부러라도 입 속에 머물게 할 필요가 있는 단어입니다.  이러면 얼마나 좋을까요?
“나 같은 사람 만나서 저 사람 참 고생했어요. 성격도 못되고 까다롭고 나 밖에 모르는 이기적인 나 같은 사람 만나서 얼마나 힘들었을까요? 그래도 수고하고 웃어 주고 한 가족이라고 보살펴 주시도 하고, 참아 주고 기다려 주고, 그러니 생각할수록 미안하지요.”
바리새인과 세리가 성전에 올라가서 기도합니다. 그런데 그 결과는 하늘과 땅의 차이입니다. 그래도 바리새인은 율법을 지키려하고 사람들에게 존경 받기도 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기도를 마치고 성전을 내려올 때, 주님은 그를 향해 불합격 판정을 내리십니다. 왜 일까요? 세리는 천하가 다 아는 죄인입니다. 자신도 자신이 죄인이라는 사실을 인정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세리가 기도하고 내려 올 때는 의롭다함을 얻게 됩니다. 왜 일까요?

바리새인과 세리의 차이는 무엇일까요? 깊이 묵상해 보면 그 차이는 아주 간단합니다.
‘하나님 앞에 정직했느냐?’의 차이입니다. 바리새인은 성전에 기도하러 올라가서 하나님 앞에 정직하지 못했습니다. 세리와 비교하다가 끝났습니다.
나는 세리와 같지 아니하다? 착각입니다. 세월 앞에서 누구나 평등합니다. 죽음 앞에서 바리새인이나 세리나 마찬가지입니다. 더구나 예수님의 십자가가 아니면 구원 받지 못할 죄인들이라는 사실 앞에서 동등하지요. 그런데 그는 하나님 앞에서, 기도하러 성전에 올라가서까지 세리보다 괜찮은 사람이라는 특권 의식 속에 빠지고 말았습니다. 그는 정직하지 못했습니다. 세리는 정직했습니다. 하나님 앞에 정직하니까 다 들키고 말았습니다. 하나님은 속 마음까지 보시니까요. 하나님 앞에 와서 다 들키는 것을 깨닫는 자가 행복한 그리스도인입니다. 내 부족함, 내 어리석음, 내안에 감추어진 불순종과 부끄러움, 세리를 다 들키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세리는 멀리서 고개도 들지 못했지요.
“다만 가슴을 치며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세리는 하나님 앞에 정직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의롭다함을 얻고 내려갔다고 설명하십니다. 하나님 앞에 정직하게 서면 다 비슷한 사람입니다. 예수님의 은혜가 아니면 구원 받을 수가 없습니다. 그러니 주님 앞에 서면 죄송할 수 밖에 없지요. 바울 사도는 로마서 1장에서 자신은 빚진 자의 마음으로 복음을 전한다고 고백했습니다. 늘 주님 앞에 정직하게 설 것입니다.
그리고 다 들킬 것입니다. 아니 이미 다 들켰습니다. 그러면 그는 주님의 긍휼하심을 얻게 될 것입니다.
 

◈사람사는 이야기

▷내려가면 거기가 낙원

어느 집안이든지 아기가 태어나면 권력 구조가 확 바뀌어 버립니다. 말할 것도 없이 갓난 아기가 왕이 됩니다. 말도 못하고 아무런 힘도 없는 아기가 왕입니다. 아기가 한 번 울기라도 하면 다 달려옵니다. 그리고 아기의 자리까지 다 내려갑니다. 왜 우는 지, 배가 고파 우는 지, 어디가 아파서 우는 지, 그걸 알아내려고 할아버지, 할머니, 가족 모두가 왕 앞에 신하들처럼 초조해합니다. 사용하는 언어도, 말도 아기의 자리까지 다 내려갑니다. 할아버지도 아버지도 전부, 밥 먹자? 아닙니다. 맘마 먹어야지, 우리 맘마 먹자입니다. 아기가 얼굴에 힘을 주더니 기저귀에서 뿌지직 이상한 소리가 났습니다. 그러면 모든 신하들이 아기의 엉덩이까지 내려갑니다.
“쌌어? 많이 쌌어? 색깔은 좋아? 됐어.”
거시기를 보면서 그렇게 진지할 수가 없습니다. 쳐다보기도 싫어하던 것을 일부러 냄새까지 맡습니다. 그러다 아기가 한 번 씨익 웃어주면 난리가 납니다.
“나를 보고 웃었어.”
“나는 벌써부터 나를 보고 소리 내며 웃었어.”
그 다음부터 아기를 웃기게 하려고 별 짓을 다합니다.
“으르릉 깍꿍, 으르릉 깍꿍.”
손녀를 처음 보면서 제가 깨달았던 진리입니다.
“내려가면 당장 낙원이 된다.”
내려가면 간단해집니다. 내려가면 쉬워져요. 체면도 내려놓고 자존심도 내려놓고 거기까지 내려가면 아기하고도 통합니다. 그러니까 내려가면 거기가 낙원입니다. 

▷이 바보야!

우스개 이야기입니다. 어느 믿음 좋은 할머니가 계셨습니다. 자식들이 귀한 앵무새 한 마리를 선물로 사왔습니다. 이 앵무새가 얼마나 순종을 잘하는 지, 오른발을 잡으면 주기도문을 외우게 했습니다. 왼발을 잡아당기면 사도신경을 외우게 했습니다.  정말 그대로 따라 했습니다. 할머니는 너무나 신기해서 옆집 할머니를 불러왔습니다.
“이 앵무새는 믿음이 좋아요. 내가 시키는대로 순종을 잘 해요. 오른발을 잡아당기면 주기도문으로 기도를 하구요. 왼발을 잡아당기면 사도신경으로 신앙 고백을 해요.”
“정말요?”
옆집 할머니가 오른발을 잡아당기니까 앵무새가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주기도문으로 기도를 하는 게 아니겠습니까? 햐! 이번엔 왼발을 잡아당기니까,
“나는 전능하신 아버지 하나님 천지의 창조주를 믿습니다.”
사도신경을 외웁니다. 으와! 감탄을 했습니다. 그런데 장난기 있는 할머니가 이렇게 물었습니다.
“두 발을 잡아당기면 뭐라고 할까? 주기도문? 사도신경?”
그때 갑자기 앵무새가 날개 짓을 파르르 하더니 풀풀 날아서 그 할머니의 이마를 콕 찍으며 이랬답니다.
“이 바보야, 두 발 잡아당기면 넘어지지.”

저작권자 © 주간포커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