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프스의 유명한 산, 융프라우를 오르기 위해서는 산악열차가 시작되는 인터라켄이라는 도시로 가야 한다. 필자가 20대에 유럽을 여행했을 때, 인터라켄에 도착해 저녁을 먹고 하루를 묵고, 새벽에 산악열차를 타려고 계획했다. 그런데 이 인터라켄까지 가는 길이 조금 복잡하다. 한국의 강원도 산골에 들어가는 길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인터라켄까지 들어가는 기차는 하루에 세 대 정도 있었던 것 같다. 이 열차를 놓치면 모든 일정을 다음날로 미뤄야하기 때문에 반드시 탑승을 해야했다. 그래서 끼니도 포기하면서 당일에 도착하려고 안간힘을 썼다. 고생 끝에 인터라켄에 도착한 시각은 밤 10시가 다 되어갔다. 한참을 걸어 통나무집 같이 생긴 숙소에 도착했다. 방에는 벙크 침대 4개가 있었다. 지친 몸을 이끌고 간신히 잠자리에 누웠는데 어찌나 배가 고픈지 도무지 잠이 오질 않았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취사장 앞을 거닐고 있는데 어둠 속에서 반가운 한국말이 들렸다. 한국에서 온 대학생들이 라면을 끓여 먹고 있었다. 정말 반가운 광경이었지만 선뜻 아는 척 하기가 민망해 주위만 어슬렁거렸다. 그런데 그 중 한 명이 내게 먼저 다가와 라면 그릇을 내밀며 같이 한그릇 하자고 제안했다. 반색을 하며 얼른 그릇을 받아들고 마치 오래된 친구처럼 자연스럽게 합석을 했다. 그들은 고추장에 비빈 밥 한 그릇도 선뜻 내주었다. 그리고는 다음날에 한국으로 돌아가기 때문에 필요없다면서 남은 고추장과 김까지 내게 건넸다. 일주일 동안 먹을 든든한 양식이 생긴 셈이다. 이들과의 인연은 한국을 돌아와서도 아주 오랫동안 지속되었다. 그 중 한 명은 대학을 졸업하고 여행사에 취직을 했는데, 당시의 유럽여행 경험 덕분에 유럽 여행 담당자가 되었다. 그는 싸고 깨끗한 호텔, 맛있는 한국 식당, 알려지지 않은 지역 명소 등 필자가 깨알같이 정리해둔 유럽여행의 알짜정보를 제공받아 인기있는 가이드로 직장 내에서 인정받았다.


    스위스의 취리히에 도착했을 때도 해가 지고 있었다. 숙소를 정하지 못하고 기차역 앞의 큰길을 따라 한참을 걷고 있는데, 현란한 불빛이 눈길을 사로잡았다. 불빛 쪽으로 방향을 잡아 다가가서 보니, 사람들로 북적였다. 리어카에서 팔찌를 팔고 있는 아저씨가 밤새 축제가 열린다고 했다. 어차피 잠 잘 곳도 마땅치 않았는데 잘 됐다 싶어 놀이공원 앞의 벤치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그런데 새벽 3시가 지나자 배가 고프기 시작했다. 빨리 날이 밝아 국경을 넘어야 하는데, 아직 반 나절이나 남았다. 뭐라도 사먹고 싶었지만 그나마 환전한 스위스 프랑이 다 떨어졌다. 벤치에서 일어나 무작정 기차역으로 향했다. 그런데 기차역 앞에서 반가운 얼굴을 만났다. 며칠 전 제네바에서 만난 한국인 노부부였다. 근처 호텔에서 숙박을 하고 있었는데 일찍 잠이 깨어 산책을 나왔다고 했다. 노부부는 역전 앞에 있는 맥도널드에서 필자에게 커피와 샌드위치를 사주었다. 환전한 돈을 다 써버렸다고 하니까 자신들이 며칠 동안 모아둔 스위스 동전을 한 꾸러미 꺼내 주었다. 이 부부는 그날 아침 프랑스로 떠나니 더 이상 스위스 동전이 필요없다고 했다. 정확한 금액은 생각나지 않지만 한화로 약 3만원 정도였던 것 같다. 그 돈으로 점심과 간단한 음료수, 그리고 기념 엽서까지 서너장 살 수 있었다. 객지에서 돈 없고, 배고프니 처량하기 그지 없었다. 하지만 노부부는 필자가 단지 한국 사람이라는 이유로 도움을 주었다. 몇 달 뒤 나는 그분들을 대학로에서 만나 막걸리와 파전을 대접하며 은혜를 갚았다. 


    아프리카 탄자니아에 있는 세렝게티 국립공원을 갔을 때도 잊을 수 없는 고마운 에피소드가 있다. 각국에서 모인 열 두 명의 대원들과 트럭을 타고 세렝게티를 둘러보러 나갔다. 하지만 TV에서 보았던 코끼리와 물소, 각종 동물들이 떼지어 다니는 그런 웅장한 장면들은 제대로 보지 못한 채 첫날 탐사를 접고 아쉬운 마음을 안고 숙소로 돌아왔다. 그런데 저녁부터 필자는 심한 오한과 함께 구토 증상을 보이는 바람에, 이틀 동안 꼼짝없이 숙소에 누워 있어야 했다. 먼 이국 땅에서 아파서 혼자 쓸쓸히 누워있자니 눈물이 앞을 가렸다. 괜한 고생을 사서 한다는 후회도 들었다. 열만 내리면 여행이고 뭐고 다 팽개치고  한국으로 돌아가야겠다는 다짐을 하면서 잠이 들다 깨다를 반복했다. 그런데 그 이튿날, 한국에서 온 한 대학생이 원정대에 합류했다. 골골거리는 나에게 한국산 해열제와 감기약을 선뜻 꺼내주었다. 고작 열흘긴의 일정으로 왔는데, 절반 이상을 앓아 누워있어 시간도 아깝고 마음은 답답했다. 그런 찰나에 간호해주고 걱정해주는 동료가 있어서 큰 위로가 되었다.


    필자는 대학시절 수업에 집중하지 못하고, 틈만 나면 배낭을 메고 세계 이곳저곳을 떠돌아 다녔다. 누구와 스케줄을 맞춰 여행하는 것이 싫어서 주로 혼자 다녔다. 혼자 다녔기 때문에 어쩌면 동포들의 따뜻한 마음을 더 절실히 느낄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돈도 떨어지고 몸도 지쳐 있을 때가 많았지만, 역시 집 떠나면 도와줄 사람이 같은 민족밖에 없구나’ 하는 생각을 하면서 한국인들에 대한 믿음을 가진 시절이었다. 그래서 이민을 결심했을 때에도 어딜 가든지 동포들이 있을테니 많이 도와줄 것이라는 기대도 있었다.


    그런데 막상 외국에 살다 보니 애초의 기대는 자주 어긋났다. 오히려 동포 때문에 마음의 상처를 입고 울게 되는 동포 사회의 현실을 보면서 차라리 한인사회와 인연을 끊고 떠나는 편이 낫다는 결정을 내린 이들도 여럿 보았다. 한인들 상대로 장사하는 게 싫어서 따로 알리지 않고 개업을 하거나, 광고를 꺼리는 업체들도 여럿 봤다. 한인을 상대하는 비즈니스가 제일 성가시다는 말도 자주 들었다. 자신의 불만을 큰소리로 떠들고, 웨이츄레스들의 작은 실수도 용서하지 않는 이들이 같은 동포라는 얘기다. 뿐만 아니라  봉사하는 마음으로 만들어진 한인회, 노인회, 노우회 같은 단체들의 끊임없는 소송은 한인사회의 분열을 선동하는 주범이 되고 있다. 지금은 한인사회의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 것이 마음 편하다는 말이 이해가 갈 정도로 분열되어 있다. 이 모든 사태가 말에서 시작된 것은 아닐까. 서너 줄은 족히 되는 말들을 마음대로 줄여서 말을 옮기다 보니 오해가 쌓이고, 관계가 시큰둥해지면서 급기야 싸움에 이르게 되기 때문이다. 올해도 벌써 반이 훌쩍 지났다. 우리는 먼 이국땅에서 외로움과 서러움을 함께 견뎌온 동지들이 아닌가. 전세계 어느 한인사회를 방문하더라도 서로를 반갑게 맞이할 수 있기를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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