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스앤젤레스(LA) 폭동이 발발한 지 오는 29일로 꼭 30년이 된다. 1992년 4월 29일 미주 한인사회는 이민자들이 피땀 흘려 형성해놓은 LA 한인타운이 폭도들의 방화와 약탈로 폐허가 되어가는 모습을 처참한 심정으로 지켜봐야 했다. 한인 이민 120년사에서 가장 암울하고 참혹했던 그 폭동의 의미를 우리는 간과해서는 안 된다. 


     1991년 3월 LA에서 백인 교통 경찰관들이 과속으로 질주하던 흑인 운전자 로드니 킹(Rodney King)을 체포하는 과정에서 무차별 구타가 있었다. 백인 경찰관들의 집단 구타로 인해 로드니 킹은 평생 청각장애인으로 살아야 했다. 이런 심각한 사건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법정은 백인 경관들에게 무죄평결을 내렸다. 경찰관들이 로드니 킹을 집단 폭행하는 모습이 TV로 공개되자, 미국 사회의 특권계층인 WASP(백인, 앵글로 색슨, 개신교)에 비해 상대적 빈곤과 박탈감을 안고 있던 빈민층의 흑인 사회가 폭발했고, 급기야 6일간의 폭동으로 번지게 되었다.  


    그런데 이들은 왜 한인타운을 타겟으로 삼았을까. 이는 일명 '두순자 사건'으로 연결된다. 로드니 킹의 평결 결과가 나온 비슷한 시기에 한국계 미국인 두순자씨가 자신의 상점에서 흑인 소녀를 사살하면서, 흑인 사회의 분노가 촉발되는 사건이 또 발생했다. 두순자 사건이란, 상점을 운영하던 49세의 한국 출신 이민자 두순자가 15세 흑인 소녀 라타샤 할린스가 오렌지 주스를 훔쳐가는 것으로 오인해 말다툼과 몸싸움 끝에 두씨가 권총을 꺼내 할린스를 총격했고 소녀를 사망하게 만든 사건이다. 이 사건에 대해 배심원은 유죄 평결을 내렸다. 검사는 흑인 사회의 반발을 고려해 무기징역을 구형했으나, 판사는 두씨가 재범의 가능성이 적다는 이유로 400시간의 사회봉사 명령과 함께 집행유예 판결을 내렸다. 결국 이러한 판결로 인해 흑인들은 사법 시스템 및 한인들에 대한 반감이 확산되었고, 결국 로스앤젤레스의 흑인 지역에서 장사하던 한국인들이 흑인들의 주요 피해자가 되는 단초를 제공했다. 흑인들은 자신들은 무시한다는 이유로 주로 코리아타운을 약탈 타겟으로 삼아 방화를 하는 등 무법천지를 만들었다. 이렇게 LA 폭동은 로드니 킹을 구타한 백인 경관들의 무죄 평결이 도화선이 되었고, 흑인들의 분노의 불똥이 ‘한흑 갈등’으로 왜곡돼 튀면서 LA 한인사회는 폭동의 최대 피해자가 됐다. 폭동 중 50~60명이 살해를 당한 것으로 추정되고 수백명의 부상자가 발생했으며 LA 코리아타운의 90%가 파괴되었다.  


    폭동이 시작되자마자 미국 언론 ABC 방송과 LA 지국인 KABC TV에서는 1991년 3월 16일에 흑인 빈민 지역인 남부 LA에서 발생한 이른바 '두순자사건'을 집중 보도함으로써, 한국인과 흑인 사이의 인종 갈등을 몰아가며 폭동을 악화시켰다. 이러한 언론공세를 통해 흑인들의 백인들에 대한 분노를 한국인에게 돌아가도록 한 것이다. 또 로드니 킹과 두순자 사건 때, 미국 언론사들은 증거 자료로 제출된 비디오에 로드니 킹이 출동한 경찰관들 몇 명을 밀치고 구타한 장면과, 라타샤 할린스가 두순자의 안면을 여러 차례 구타한 장면이 삭제된 비디오를 방송에 내보내어 흑인들로 하여금 백인 경찰들과 한국인이 흑인을 차별한다고 생각하게 만들었다.


    사건 당시 미국 경찰은 베벌리 힐스와 할리우드 등 부촌과 백인들이 사는 지역들만 지켰고 폭행, 살인 등의 심각한 상태였던 한인 상점이 몰려 있는 지역은 방관했다. 이 폭동은 1992년 5월 1일 캘리포니아 주 방위군이 출동한 것을 계기로 서서히 진압되었다. 하지만 한흑 갈등으로 인한 LA시 전체의 피해액은 7억 1천만 달러 선으로 집계되었으며, 이중 한국인 피해액은 3억 5천만 달러로 절반에 달했다.


    LA 폭동은 장기간의 불황 속에서 사회경제적으로 소외되고 공권력 남용에 노출된 흑인 계층의 억눌린 불만이 터져 나온 미국사회의 모순과 치부가 드러난 사건이었다. 4.29는 미주한인 이민 120년사에 가장 암울하고 참혹한 시련이었다. 그러나 대전환의 키워드가 되기도 했다. 한편으로 한인들에게 이민사회의 현주소를 성찰하고 미국이라는 다인종, 다민족 사회 속에서 ‘공존’의 지혜를 일깨워준 대사건이기도 했다. 폭동으로 입은 상처와 그 상흔은 너무나도 컸지만, 그 교훈은 한인사회의 새로운 나아갈 길을 제시했다. 


    그 때 한인사회는 공권력으로부터 외면받았으며, 피해를 호소할 정치적 창구도 없었고, 한인들의 목소리를 대변할 한인 정치인이 없었다. 이에 폭동은 주류사회에 무관심했던 반성의 계기를 제공했으며, 정치에 참여해야 하는 동기를 부여해 주었다. 이후 Association of Korean-American Victims 같은 많은 활동 단체들이 구성되었고 다른 인종 집단과 꾸준히 협력 관계를 구축했다. 폭동은 한인 1.5세와 2, 3세 젊은 차세대들이 한인으로서의 정체성을 자각하고 부모 세대를 이해하면서 한인 커뮤니티로 돌아오게 만든 계기가 되기도 했다. 또한 폭동을 통해 우리는 ‘코리안 아메리칸 공동체’라는 인식을 새로 갖게 됐으며 ‘시민 참여’(Civic Engagement)를 통해 정부에 한인사회의 목소리를 전달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사실도 깨달았다. 그리고 우리를 끌어내리려고 하는 사람보다 우리와 함께 하고 우리를 도와주는 사람들이 훨씬 많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비록 30년 전의 아픈 기억일지라도, 한인사회는 이를 토대로 단순한 ‘코리안’이 아닌 ‘코리안 아메리칸’으로서 미국사회에 뿌리를 내리고 정치력을 높여가면서 이민사 100년의 미래 비전을 세워야 한다. 그리고 이제는 그 처참했던 폭동의 비극을 한인사회 발전을 위한 원동력으로 승화시켜, 화합과 공존 속에서 주류사회와 함께 한인사회의 미래를 만들어 나가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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