휄로쉽교회 이두화 담임목사

    누구나 한 번쯤 이명(異名)을 가져본 적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는가? 아마도 모든 독자 중에도 오늘날 이명을 가진 사람이 있고 또 그렇게 이명으로 불리고 있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 이명(異名)이란 ‘본래의 이름 외에도 다르게 불리는 것’을 이명이라 한다. 이런 이명을  품격 있게 사용하면‘자’나 ‘호’가 되어 사용된다. 예를 들어 다산 정약용이라고 한다면 그의 이름은 ‘정약용’ 이지만 친지들 사이에서는‘다산(茶山)’이라는 호로 불렸다. 하지만 그의 자는 ‘미용(美庸)’이다.


    ‘자’나 ‘호’의 차이점을 보면 먼저‘자’는 성인으로서의 책임을 부여하는 의미를 포함한 것으로 상대를 존중하며 부르는 의미가 있으며,‘호’는 친한 친구들과 같이 가볍게 이름이나‘자’ 대신 부를 수 있는 호칭을‘호’라 하는 차이가 있다. 그러나 이 모든 것들은 똑같은 한 사람을 부르는 다양한 호칭 즉, 이명이다. 그러나 이런‘자’나‘호’와 같은 것들은 우리의 삶에서는 자주 사용하지 않는다. 그래서 “현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도 이명은 존재하는가?”라고 묻는다면 이렇게 답 할 수 있다.  우리 삶의 전반에 이명은 다양하게 존재한다.

 
    이명은 오늘날 ‘별명’이라는 친숙함으로 우리에게 다가오기도 한다. 모두에게는 학창 시절에 갖게 된 별명이나 오늘날 친구들로부터 여전히 편하게 불리는 특정 호칭들이 있다. 또 부부 사이에서도 우리는‘여보’라는 표현도 어떻게 보면 이명이며 연인 사이에서도 그들 나름대로‘자기’와 같은 이명으로 부르는 것을 우리는 심심치 않게 목격한다. 그렇기에 우리는 모두 적어도 한 번쯤은 이명을 가져본 적도 있고 심지어 누군가는 지금도 여전히 이명으로 불리기도 한다. 특히 요즘 시대에는‘나라님’인 대통령까지도 국민들이 이명을 만들어 내고 부르는 시대이기도 하다. 이런 면에서 우리는 항상 이명이란 것을 아주 흔하게 접할 수 있고 흔하게 쓰고 있다. 물론 하나님이라고 예외는 아니다. 재미있게도 하나님도 여러 이명을 갖고 계셨다. 성경에서 나오는 하나님의 이명을 살펴보면‘여호와 이레(모든 것을 예비하시고 준비하시는 하나님), 여호와 닛시(승리하게 하시는 하나님), 여호와 라파(치유의 하나님), 여호와 샬롬(평강의 하나님)’등등 성경이 말하는 하나님의 이명도 다양하다.


    이렇게 삶의 다양한 모습 속에서 우리는 모두 이명을 사용하고 있지만 아무래도 가장 중요하게 생각해야 할 것은 “내가 상대방을 어떤 이명으로 부르는가?”이다. 왜냐하면 이명에는 사람들과의 관계가 녹아 있기 때문이다. 그것이 사회적 관계이든지, 혈연, 지연 혹은 학연 관계이든 어떤 모양을 통해서라도 삶의 관계라는 연결고리를 통해 쌓아 올린 것이 바로 이명이기 때문이다. 이런 면에서 신앙을 가진 자들이 하나님을 부르는 이명은 하나님과의 관계를 나타내는 지표로 나타나기도 한다. 이것을 가장 쉽게 볼 수 있는 것이 바로 간증이다.


    신앙의 간증을 하는 사람들의 말을 들어 보면“나에게는…이런 하나님이셨어요…”하면서 하나님 묘사하기를‘구원의 하나님, 보호하시는 하나님, 기적의 하나님, 치유의 하나님, 은혜의 하나님, 사랑의 하나님’등등으로 자신의 삶 가운데 나타난 하나님의 이명을 다양하게 표현한다. 그렇기에 자신이 경험한 하나님이 누구냐에 따라 하나님의 이명은 달라진다. 그래서 믿는 자들에게 하나님의 이명은 삶 속에서 하나님과의 친숙함 속에서 나오는 믿음의 산 증거이자 삶의 간증이 되기도 한다.


    하지만 문제는 삶의 연결고리가 없는 상황에서 부르는 이명이다. 사회 속에서도 관계없이 부르는 이명은 그저 이명일 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아무런 관계없는 사람의 이명을 안다는 것은 그 특정 사람을 부르는 이명에 대하여 알게 된 것뿐이지 나의 삶에는 아무런 관계도 없으며 아무런 의미를 주지 않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신앙에서도 하나님과 삶의 관계없이 부르는 하나님의 이명이라면 그 이명은 알아도 경험되지 않는 관계없는 하나님이 된다. 이러한 이야기가 B.C.568년경에 애굽으로 피신한 유다 백성들의 이야기이다. 이 당시 하나님은 자신 스스로에 대한 이명으로 이렇게 말씀하신다. 바로“만군의 여호와라 일컫는 왕”이다.


   만군의 여호와라 일컫는 왕이 이르시되 나의 삶으로 맹세하노니 그가 과연 산들 중의 다볼 같이, 해변의 갈멜 같이 오리라 <예레미야 46:18> ‘만군의 여호와’는 당시 과거 믿음의 조상, 선진 들이 하나님을 부르는 이명 중에 하나이었다. 그리고 이 당시에 유다 백성들이 경험해야 하는 가장 필요한 하나님의 능력이었다. 그러나 유다 백성들은 만군의 여호와라는 이명을 들어 보아서 알고 있었지만, 삶 가운데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고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그들은 만군의 여호와라는 이명을 알고 불렀지만, 그것을 경험하지 못했다. 그리고 그들은 오히려 만군의 여호와를 통해 심판을 경험하는 백성이 되어 버렸다. 만약 유다 백성들의 삶 속에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며 살았더라면 그 하나님의 이명대로 만군의 여호와 하나님을 경험했을 것이다.


    우리가 즐겨 사용하는 하나님의 이명은 어떤 것들이 있는가? 물론 이명을 알고 부르는 것이 모르고 부르는 것보다는 좋을 수 있지만, 내 삶에 아무런 관련이 없이 부르는 이명, 다른 사람이 부르는 이명이라면 그 이명을 삶 속에 경험하기 힘들 것이다. 그렇기에 모든 신자는 삶 속에서 하나님과의 관계를 쌓아야 한다. 그래야 우리는 하나님의 다양한 이명을 경험할 수 있는 자가 될 수 있다. 필자는 모든 덴버의 교회 성도들이 삶으로 하나님의 이명들을 삶으로 경험하는 자들이 되기를 소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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