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빛교회 유지훈 담임목사

    단테의 신곡에 나오는 일곱 가지 죄 중 여섯 번째는 시기입니다. 사람은 참 시기와 질투를 잘 합니다. 그리고 남이 나를 질투하도록 만들려고 노력도 많이 합니다. 누군가가 직장에서 승진을 하거나 아이가 상을 받거나 어떠한 경사가 나면 그것을 함께 기뻐해 주고 축하해 주는 것으로 끝나지 않고 자신도 자랑을 늘어 놓기 시작합니다. 내가 자랑 할 거리가 없으면 상대방의 좋은 일 가운데서 아쉬운 점들을 부각시키고 안타까워 하는 척합니다. 사람에게는 자기 자신을 들어내고 인정받고 싶어하는 본능이 있습니다. 다른 사람들이 별 관심이 없으면 조금이라도 더 자신을 부각시켜 상대방에게 인지하도록 합니다. 누군가가 나의 가치를 알아주고 인정해 주는 것만큼 달콤한 것도 없습니다. 그리고 뭐니뭐니 해도 가장 좋은 인정은 누군가와 나를 비교하며 나는 치켜 새워주는 것입니다. 때로는 우리의 신앙 생활도 그렇습니다. 나는 하나님을 이렇게 잘 섬긴다며 자신의 경건을 나타내기를 좋아합니다. 장로, 집사, 권사 등의 직분을 받으면 그렇게 자랑을 합니다. 자기 자신이 교회에 봉사한 것들을 들어내며 그렇게 하지 못한 자들을 비판합니다. 물론 직접적이 아니라 간접적으로 말입니다. 그러면서 신앙 생활을 자기 자신들이 잘 지킬 수 있고 잘 지켜 온 법과 계명으로 제한 시켜 버립니다. 많은 사람들은 기독교는 법과 규칙이 전부인 것처럼 생각합니다. 그래서 어떻게 그렇게만 살 수 있느냐 라고 묻는 경우가 많습니다. 술도 못하고 담배도 못 피면 무슨 재미로 사느냐? 크리스천은 클럽에, 혹은 노래방에 가도 되느냐 안되느냐? 어떻게 배우자 한 명과 평생을 살 수 있느냐? 오징어 게임 같은 잔인하고 타락한 세상을 보여주는 드라마 등을 봐도 되는가? 많은 크리스천들도 이러한 법과 규칙만을 중요시 생각하며 생활합니다. 그리고 이것들을 지키지 못하는 자들을 정죄하고, 지키며 살아가는 자기 자신을 나타내기 위하여 애를 씁니다.


   예수님 시대에도 이러한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바리새인들, 서기관들, 사두개인들, 제사장들, 바로 종교 지도자들입니다. 이들은 철저히 율법을 지키고 사람들 앞에서 인정 받기를 원한 자들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예수님을 따르고 예수님께서 인기를 얻으시자 그를 시기하고 질투하였습니다. 그러면서 율법들을 통하여 예수님을 곤경에 빠지도록 노력했습니다. 성경에 보면 “예수를 시험하여 묻되” 라는 말이 참 많이 나오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남자가 아내를 버리고 이혼해도 됩니까? 가이사에게 세금을 내는 것이 합당합니까? 왜 안식일에 일을 하십니까? 왜 당신의 제자들은 장로의 전통을 따라 손을 씻지 않습니까? 이러한 질문들은 예수님을 곤경에 처하게 하시고 자기 자신들을 높이고 들어내는 질문들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이런 질문들을 받으실 때마다 질문의 초점을 바꾸십니다. 이혼이 문제가 아니라 결혼이 어떤 것인지 말씀하십니다. 가이사의 형상이 있는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형상이 있는 것은 하나님에게 받치라 하시면서 우리는 돈이 아니라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을 받은 우리 전부를 드려야 한다고 하십니다. 진정한 안식은 아무것도 안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역에 동참하는 것이고 겉에서 들어가는 것보다 내 안에 있는 것이 나를 더럽힌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진정한 믿음의 삶은 무엇을 해도 되고 하면 안되는지가 아니라 삶의 초점을 어디에 두고 사느냐에 있습니다. 똑같은 일을 해도 나의 마음이 어디에 있느냐가 중요합니다. 내가 이것을 하는 이유가, 내가 이것을 하지 않는 이유가 나 자신을 높이고 들어내기 위해서인지, 아니면 진정으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 나라를 위해서인지가 중요합니다. 


   우리는 십계명 중 여덟 계명이 부정적으로 표현된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무엇 무엇을 하지 말아라 라고 하실 때에 단순히 그 행위를 하지 않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를 진정으로 사모하면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생각해야 합니다. 살인하지 말라 라고 하시면 나는 누구도 죽이지 않았으니까 괜찮아 라고 생각하고 거기서 멈추면 안됩니다. 누구든지 형제를 미워하면 이미 마음속으로 살인을 하였다 라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이 말씀은 그러니까 누구를 미워할 바에 아예 상대하지 않는 것이 나은 것처럼 받아드려서도 안됩니다. 형제의 인격을 존중하고 그가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을 받았기 때문에 그를 하나님께 하듯 대해야 합니다. 이러한 삶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로서의 삶의 초점이 되어야 합니다. 이러한 삶은 겸손하지 않으면 살 수 없습니다. 어떻게 우리가 누구도 미워하지 않고 살 수 있을까요? 어떻게 누구를 시기하지 않고 살 수 있을까요? 우리가 자신을 내세우고 자랑하지 않고 살 수 있을까요? 이렇게 사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우리의 힘으로 이렇게 살려고 한다면…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내가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누구든지 어린이와 같이 하나님 나라를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은 거기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막 10:15, 새번역). 예수님 시대에 어린이는 스스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존재들이었습니다. 사회적으로 쓸모없고 능력이 없는 존재였습니다. 그들이 살 수 있는 방법은 부모에게 전적으로 의지하는 것밖에는 없습니다. 하나님 나라의 삶은 이렇게 내가 아무것도 아님을 인정하고 자신의 힘을 의지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전적으로 의지하는 삶입니다. 시기, 질투, 욕심 다 버립시다. 내 자신을 내 세우는 것이 아니라 오직 겸손히 주님을 의지합시다. 내가 해야 하는 것, 하지 말아야 하는 것 보다, 하나님의 마음에 더 초점을 두며 우리를 위하여 대신 그렇게 사신 예수님께 의지하시길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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