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방학이 시작되면서 필자의 집은 하루도 거르지 않고 아이들로 북적이고 있다. 두 아들의 친구들이 번갈아 집에 놀러 오는 탓인데 낮시간에 놀러오는 아이들도 있지만, 일주일에 한두번은 꼭 슬립오버를 한다며 우리집에서 밤을 보낸다. 십대 사춘기 아이를 둔 한국 엄마들이라면, 학교에서 혹시 내 아이가 왕따를 당하고 있는 건 아닐까, 친한 친구가 없어서 점심을 혼자 먹는 건 아닐까, 친구들과 어울리지 못해 외로운 학교생활을 하는 건 아닐까 하는 고민을 한번쯤은 해 봤을 것이다. 필자도 그랬다. 가끔 지인들로부터 그들의 자녀들에 대해 들어보면 생일파티에도 자주 초대받고, 플레이 데이트에도 잘 어울리는 것 같은데 우리집 아이들은 그러지 못했다. 그런데 두 아들이 각각 중학교와 고등학교에 들어간 후에는 '아이들에게 친구가 없으면 어떻게 하나' 하는 나의 걱정은 기우였음을 깨달았다. 이제는 귀찮을 정도로 아들들의 친구들이 들락날락하기 때문이다. 두 아들은 자신들의 인기가 높아져서 학교 친구들이 많이 생겼다고 말하지만, 필자의 생각은 다른 방향에 꽂혀있다. 그들을 인기있게 만들어준 것은 다름아닌 한국 음식이었다고 본다. 필자는 엄격한 아버지 때문에 친구집에서 밤을 새워 놀아본 적이 거의 없었다. 아주 어릴 적부터 남의 집에 가서 오래 있으면 실례이고, 행여 남의 집에 갈 일이 있으면 빈손으로 가지 말며, 식사 때가 되면 각자의 집으로 돌아가는 것이 예의라는 가르침을 받았기 때문이다. 그러다 보니 부모가 되어서도 나의 오래된 생활방식은 바뀌지 않았다. 그런데 이곳 아이들의 슬립오버는 서로간의 친밀한 관계를 증명하는 가장 일상적인 방식이라는 것을 시간이 지나면서 깨닫게 되었고, 필자 또한 오래된 가치관을 버리고 이를 수긍할 수 밖에 없었다.


    큰아들이 고등학교 1학년 때 세명의 친구를 데리고 와서 처음 슬립오버를 하는 날이었다. 지하실에서 게임도 하고 탁구도 치고 농구도 하면서 온 집안이 시끄러웠다. 필자는 밤 10시가 지나자, 에너지를 한껏 소비한 아이들이 출출할 것이라는 생각이 들어 간식으로 만두를 튀겨주었다. 그 전날 코스코에서 한국 만두를 한봉지 사왔는데, 그걸 그렇게까지 좋아할 것이라고는 상상하지 못했다. 한명당 5개씩을 계산해서 20개를 튀겼는데 금세 다 먹어치웠다. 그래서 20개를 더 튀겼는데 그것도 게 눈 감추듯 해치워버렸고, 할 수 없이 남은 만두도 모두 꺼내 튀겨주었다. 그렇게 만두 한봉지는 순식간에 없어져 버렸다. 그날부터 아이들은 한국 만두 맛에 빠져버렸고, 만두가 먹고 싶어 하루가 멀다하고 우리 집을 들락거리기 시작했다. 물론 만두는 중국식당에서 흔히 접할 수 있는 메뉴이기는 하지만, 한입에 들어갈 정도의 적당한 크기에 닭고기, 불고기, 돼지고기 등의 여러가지 맛을 즐길 수 있다는 것을 즐거워했다. 세명의 금발머리 소년들은 한국 기업에서 만든 만두가 최고라고 설명하는 아들의 말에 동조한다는 의미로 엄지를 치켜들었고, 몇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그들은 만두의 맛에 빠져있다. 일주일 후 그 친구들에 두명의 친구들이 더해 다섯명이 우리 집을 찾았다. 이들은 너무 맛있는 만두 소식을 듣고 왔는데, 정작 이들이 사랑에 빠진 것은 라면이었다. 미국의 맛없는 치킨 맛의 라면만 먹어본 아이들은 한국의 라면에 반해버렸다. 너무 매울 것 같아 우리가 즐겨 먹는 신라면 대신 삼양라면과 스낵면 등을 내놓은 것은 탁월한 선택이었다. 그리고 우리가 먹는 방식 그대로 계란도 넣어주었다. 한번 맛본 라면 맛은 절대 잊지 못하는 법, 그 뒤로 일주일 내내 그들은 우리집에서 한국의 여러 브랜드의 라면을 끓여 먹었고, 아들은 이들에게 물의 양과 계란투하법 등 라면을 끓이는 법을 전수해주었다. 또, 라면을 사고 싶어하는 친구에게는 한인마켓의 위치를 가르쳐 주기까지 했다.


    슬립오버를 하는 아들들의 친구들에게 가장 인기있는 아침 메뉴는 꼬마김밥과 떡갈비이다. 김밥용 김 혹은 조미김 한장을 6장으로 잘라 한숟갈 정도의 밥을 얇게 펴서 그위에 채썬 오이와 단무지, 그리고 구운 햄을 얹어 돌돌 말면 꼬마김밥이 완성된다. 필자만의 초간단 레시피이지만 아이들에게 가장 인기있는 아침 메뉴이다. 10개를 만들어놓으면 이것도 순식간에 사라진다. 여기에 한인마트에서 파는 떡갈비 한조각과 계란말이를 각자의 접시에 담아내면 그럴싸한 브랙퍼스트가 완성된다. 이런 생활이 반복되다 보니 갑자기 실험정신이 발동했다. 그래서 지난 주에는 라면에다 만두를 한개씩 추가해서 끓여주었고, 여기에 살짝 씻은 김치를 곁들었다. 그런데 김치에 대한 반응은 기대 이상이었다. 모두 한국 김치는 처음이었는데, 거부반응 없이 맛있다며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리고 아들은 라면을 먹을 때는 김치와 같이 먹는게 최고라면서 면발 위에 김치를 얹혀 먹는 방법을 직접 보여주었고, 다같이 국물에 밥까지 말아서 나눠 먹었다. 이번 달 초 SAT 시험을 마치고 이 아이들은 슬립오버를 위해 또다시 필자의 집에서 뭉쳤다. 그날의 메뉴는 한국의 대표 메뉴인 갈비였다. 시험 치느라고 고생했다는 격려차원에서 준비한 것이었다. 한국인이면 모두 알겠지만, 갈비 굽는 냄새는 미국의 바베큐와는 비교가 안될 정도로 구미를 당긴다. 결국 5명의 아이들은 준비해 둔 10인분의 갈비를 거의 다 먹어 치웠고, 밤 12시가 넘어서 라면까지 끓여 먹으며 우정을 쌓았다. 아들 친구들의 입소문은 생각보다 빨리 퍼졌다. “캐빈 헨리 집에 가면 한국 만두, 라면, 김밥, 갈비를 먹을 수 있는데 진짜 진짜 맛있다” 고 말이다. 덕분에 필자의 아들들은 한국음식에 더 많은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집에 오는 친구들에게 자세하게 설명을 해주기 위해서다. 비록 이런 노력이 작고 미흡하더라도 꾸준히 이뤄진다면 한국을 알리는 아주 의미 있는 일이 될 것이다. 특히, 중고등학교 때 한국의 김치, 김밥, 라면, 불고기, 갈비를 먹어 본 미국 아이들은 시간이 흘러 한국음식의 홍보대사가 될수도 있지 않을까. 이번 주말 큰아들은 친구들과 또 슬립오버를 할 생각이라고 한다. 이들의 슬립오버의 묘미는 역시 한국음식. 이번에는 비빔밥을 만들어 볼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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