덴버삼성장로교회 이동훈 담임목사

    신약성경 누가복음 15장에는 집을 떠나 세상으로 나가 허랑방탕하며 살다가 만신창이가 된 몸과 마음을 이끌고 아버지의 집으로 다시 돌아오는 소위 ‘돌아온 탕자’ 이야기가 그려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아들을 대하는 아버지의 모습이 그려지고 있습니다. 세상으로부터 돌아 온 아들을 아버지는 어떻게 대합니까? 첫째로 아버지는 돌아오는 아들을 보고‘측은히’여겼습니다(누가복음 15:20). 측은히 여겼다는 말의 헬라어는‘스플랑크니조마이’인데,‘내장이 끊어질 정도로 마음이 아파서 견딜 수 없는 상태’를 나타내는 단어입니다. 복음서를 보면 우리 예수님께서“불쌍히 여기셨다, 민망히 여겼다”라는 표현이 참 많이 나옵니다. 같은 의미입니다. 영어로는‘compassion’입니다. ‘측은히’라는 표현 속에는 나의 고통보다 상대방의 고통을 더 크게 여기는 아버지의 심장이 있습니다. 이 아버지인들 왜 아들로 인해 상처받지 않았겠습니까? 창피스럽고 부끄러웠을 것입니다. 가문의 수치라고 여겨 얼굴을 들지도 못했겠지요? 작은 아들로 인해 멍들어 새까맣게 타 들어갔을 아버지의 가슴을 헤아려 보셨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보다 아들에 대한 걱정이 더 컸던 이 아버지, 이것이 측은히 여기고 다가오는 마음입니다. 이것이 우리들을 향한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이 아니겠습니까? 그래서‘축은지심’(惻隱之心), 곧 측은히 여김은 모든 치유와 관계회복의 출발점이 됩니다. 상대방을 불쌍히 여기기만해도 문제가 해결되고 관계가 회복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둘째로 아버지는 아들을 기꺼이 용서하고 은혜를 베풀었습니다. 아들이 아버지를 향해 용서를 구하기도 전에 아버지는 먼저 달려가 아들을 품에 안습니다. 그리고 화해의 입맞춤을 합니다(누가복음15:20). 성경이 말하는 진정한 용서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그것은 가해자가 먼저 피해자에게 용서를 구하는 것이 아니라, 피해자가 먼저 가해자에게 용서의 팔을 벌리는 것입니다. 자신에게 베풀어지는 아버지의 이 용서의 은혜때문에 아들의 마음은 무너져 내립니다. 어떻게요?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사오니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하지 못하겠나이다”(누가복음15:21). 자신의 죄인 됨을 고백합니다. 어쩌면 우리 모두는 죄지어서 회개하는 것이 아닐지도 모릅니다. 한정 없이 부어지는 하나님의 은혜때문에 회개하는 것이 아닐까요? 용서의 은혜가 베풀어지는 곳에서 치유의 역사가 일어나고 관계회복의 역사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셋째로 아버지는 비판과 정죄의 눈을 거두고 아들을 대합니다. 먼저 가장 소중한 존재임을 집안사람들에게 확인시킵니다. 종들에게 제일 좋은 옷을 입히고 손에 가락지를 끼우고 발에 신을 신기라고 명령합니다(누가복음15:22). 우리들의 인간관계에서 진정한 화해와 용서가 어려워지는 이유가 뭔지 아십니까? 비판과 정죄의 눈 때문입니다. 상대방을 향한 책망과 질책의 눈입니다. 그러나 아버지는 아들에게 제일 좋은 것을 내어 줍니다. 돌아온 아들을 위해 잔치를 베풀어 줍니다 (누가복음15:23). 아마도 아버지를 뺀 집안사람들 모두는 이 아들을 향한 비판의 눈을 부라렸을 것입니다. 그리고 아버지의 행동을 비난했을지도 모릅니다. 정말 그런 사람이 있었습니다. 누구입니까? 큰 아들입니다. 그는 알거지가 되어 돌아온 동생이 꼴 보기 싫었습니다. 야단을 치기는커녕 살진 송아지를 잡아 잔치를 베푸는 아버지도 못마땅했습니다. 그래서 아버지에게 이렇게 볼멘소리를 합니다. “아버지의 살림을 창녀들과 함께 삼켜버린 이 아들이 돌아오매 이를 위하여 살진 송아지를 잡으셨나이다”(누가복음15:30). 인생을 행복한 것으로 보면 한없이 인생은 아름답습니다. 그러나 인생을 실패와 어두운 것으로 보면 절망할 일밖에 없습니다. 비판의 시각으로 보면 한없이 비판할 거리만 생깁니다. 미운 며느리가 냉장고 문만 열어도 시어머니 눈에는 200가지 잘못이 보인다고 하지 않습니까? 이 베풀어진 잔치에서 가장 손해 본 사람이 누구일까요? 비판과 분노와 질투의 노예가 되어 잔치에 참여하지 못하는 큰아들이 아닐까요? 아버지는 자신에게로 다시 돌아온 아들을 이렇게 정의합니다. “이 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다시 얻었노라”(누가복음15:24). 이것은 아들의 과거를 보지 않고 미래를 바라보는 아버지의 마음입니다. 죽었던 과거가 아니라 이제 다시 살아나 살아갈 앞으로의 미래를 보는 것입니다. 이것이 아들을 바라보는 아버지의 시각입니다. 잃어버렸던 과거가 아니라 다시 얻어 함께 할 미래의 행복한 관계를 바라봅니다. 이 아버지의 이 시각이 다른 사람들은 다 비난하고 비판하고 정죄해도 아버지는 결코 그럴 수 없는 이유입니다. 이것이 불쌍히 여기셔서 그리스도 안에서 나를 용서해(에베소서 4:32) 주신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이기도 합니다. 이 하나님 아버지의 조건 없는 죄 용서를 알고 경험했다면 우리도 서로 용서하며 사십시다. 시어머니를 용서하고, 자녀를 용서하고, 부모를 용서하고, 형제를 용서하며 사십시다. 그래서 관계의 상처들이 싸매어지고 진정한 치유를 경험하며 용서의 축복을 누리며 살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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