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원순 서울시장이 숨진 상태로 발견됐다. 유서 내용이 공개되고, 타살 흔적이 없어 자살로 결론지어졌다. 지난 9일 오후 5시쯤, 박 시장의 딸이 아버지가 유언과 같은 이상한 말을 남기고 집을 나갔는데 전화기가 꺼져 있다며 112에 실종신고를 했다. 휴대전화 위치 추적 결과 성북구 북악산 인근에서 마지막 신호가 잡힌 뒤 끊겼다. 경찰 6백여명이 동원되어 밤늦은 시각까지 수색을 벌였고, 실종신고 7시간 만에 북악산 숙정문 인근에서 그의 시신을 찾아냈다. 장례식을 마친 지금까지도 박 시장의 정확한 사망 이유는 파악되지 않고 있다. 1천만 수도 서울의 시정을 책임진 시장의 갑작스런 사망 소식은 사상 초유의 일이다. 서울시장은 대한민국의 모든 기능이 집중된 수도의 살림살이를 책임지면서 예산 40조를 집행한다. 그래서 정치적 위상도 높다. 뉴욕타임즈는 서울시장의 죽음에 대해 '대통령 다음으로 힘 센 공직자가 숨졌다'고 보도했고, 월스트리트 저널은 '한국의 넘버2 선출직이 사망했다'며 대서특필했다. 이외 로이터, AFP, 블룸버그통신도 실종됐던 박 시장이 숨진 채 발견됐다는 뉴스를 긴급으로 내보내며 관심을 보였다. 9년동안이나 서울시장직을 수행해온 박 시장은 역사상 최초의 3선 서울시장이자 더불어민주당 내 유력 대선주자 중 한 명이었다. 또, 그는 20년이 넘게 시민사회에서 활동해온 한국 시민운동 역사의 산 증인이기도 하다. 


      박 시장은 1975년 법조인의 꿈을 안고 재수 끝에 서울대 사회계열에 합격했다. 하지만 입학한 지 3개월 만에 고(故) 김상진 열사의 추모 시위에 참가했다는 이유로 투옥돼 4개월간 옥살이를 하고 학교에서도 제적됐다. 그는 이 때를 회상하며 자서전을 통해 "자신의 인생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고 밝힌 바 있다. 이후 단국대 사학과를 졸업하고 1980년 사법고시에 합격한 후 대구지검 검사로 재직했다. 하지만 사람 잡아넣는 일이 체질에 맞지 않아 6개월 만에 사표를 썼다는 게 박 시장의 생전 설명이다. 그리고는 1983년 변호사 사무실을 개업하면서 '박종철 고문치사사건' 등 시국사건들의 변론을 맡으며 인권변호사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이 중에서도 우리나라 최초로 제기된 성희롱 관련 소송인 서울대 우조교 성희롱 사건의 변호인으로 주목받았다. 직장 내 성희롱이 불법이라는 인식을 최초로 갖도록 한 이 사건은 6년의 법정 공방 끝에 서울고법에서 승소 판결을 이끌어냈다. 그리고 1994년, 한국의 대표적인 시민단체인 '참여연대' 의 설립을 주도하면서 시민운동에 첫발을 내디뎠다. 
이렇게 시민운동을 한국사회에 정착시킨 박 시장은 2000년부터 '기부·나눔·참여'에 관심을 두며 또 한 번 새로운 도전을 시작했다. 그러던 중 2011년 오세훈 전 서울시장의 사퇴로 공석이 된 서울시장 후보로 급부상하게 되었다. 한국 역사상 처음으로 시민운동가 출신이 서울시장으로 대중 정치의 영역에 도전하게 된 것이다. 선거 과정에서 우여곡절도 많았다. 병역, 가족사, 학력, 과거 이력 관련 의혹들이 쉴새 없이 제기됐다. 그러나 그는 결국 서울시장이 되었고, 반값등록금, 무상급식, 비정규직 정규직화 등의 혁신 정책을 하나둘씩 차근차근 실행에 옮겼다. 최근까지도 '서울 10년 혁명'을 끝까지 완수하겠다는 포부를 밝히며 이슈들을 선도해왔다.


       항상 새로운 영역에 도전하고 독창적인 아이디어를 실현시켜왔던 그는 ‘대통령’이라는 큰 꿈도 그리고 있었다. 특히 박 시장은 이번 코로나 19와의 싸움에서도 가장 공격적인 지도자 중 한 사람으로서 서울과 수도권을 코로나로부터 지켜낸 인물로 평가받았다. 그랬던 그가  '서울시 10년 혁명' 완성을 1년 2개월, 대선을 1년 6개월 남짓 남겨두고 스스로 죽음을 선택했다. 인권변호사에서 시민운동가, 3선 서울시장 그리고 대선주자까지, 그의 삶은 열정이 담긴 도전 그 자체이었다. 그랬기에 그의 사망 소식은 참으로 안타깝다. 진심으로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빈다. 하지만 그의 선택은 결코 칭찬받을 수 없는 선택이다. 지금까지 그가 지켜왔던 신념과 의지를 한꺼번에 무너뜨린 선택이 아닐 수 없다. 박 시장이 죽음을 결심한 바로 전날, 전 비서는 2017년부터 4년간 박 시장으로부터 성추행을 당했다는 내용으로 고소장을 접수했다. 그동안 대한민국 직장 내 성희롱 피해자들의 든든한 보호자 역할을 해왔던 그가 되려 성추문의 당사자로 지목되면서 상당한 정신적 혼란에 휩싸였을 것이라 짐작된다. 물론 박 시장의 죽음이 그 성추문과 관계있다는 사실은 확인되지 않았다. 하지만 성추문 피소 논란 직후 죽음을 선택했기 때문에 이와 전혀 관련이 없다고도 단언할 수 없다. 


     이 사건은 피고소인 박 시장이 사망함에 따라 공소권 없음으로 마무리 되었다. 그러나 일부 박 시장의 추종자들은 박 시장을 죽게한 장본인으로 고소인을 지목하며, 2차 가해가 일어나고 있다. 박 시장의 장례식을 두고 떳떳한 죽음이 아니기 때문에 '서울특별시 기관장'이 아니라 조용한 '가족장'으로 치러야 한다는 국민 청원이 50만명을 돌파했다. 이는 박 시장이 국가와 국민을 위해 싸우다가 목숨을 잃은 열사가 아님을 방증하는 현실이기도 하다. 박 시장의 죽음 앞에 날선 비판이나 애매한 추측은 삼가고 싶다. 하지만 잘못이 있다면 인정하고, 사과하고, 남은 생을 반성하며 살아가는 것 또한 한시대를 풍미한 지도자의 모습이다. 고 노무현 대통령, 박원순 서울시장은 대한민국의 대표적인 지도자로서, 국민들의 정신적 지주역할을 해온 사람들이다. 이런 지도자들의 자살 선택은 모든 국민들을 허탈하게 만든다. 그들이야말로 자살하려는 국민들에게 먼저 용기를 주고, 삶을 이끌어주는 책무가 있는 사람들이다. 자살은 그 죄를 탕감하는 방법이 아니다. 결코 면죄부가 될 수 없다. 때문에 죽음으로서 현실을 회피하려는 비겁한 선택은 어떤 이유로도 미화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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