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하린 기자

 대학교 2학년을 마치고 1년을 휴학했다. 돈을 좀 벌어보겠다고 휴학을 하긴 했는데, 친구들 꼬임에 빠져 손가락 사이로 모래가 새듯 힘들게 벌어놓은 돈을 다 써버리고 달랑 200만원이 남았다. 엄마는 그 돈으로 등록금을 하라고 신신당부 했지만 프랑스에 가고 싶었던 나는 그 돈을 들고 유럽으로 날라버렸다.

  60만원짜리 왕복 항공권을 끊고나니 140만원이 남았는데, 머리를 굴리고 굴려서 유레일 패스 10일짜리 끊고, 또 프랑스 안에서만 펀치 카드 식으로 쓸 수 있는 기차 패스 3일짜리 끊고 나니 정말 돈이 1백만원 정도 밖에 남지 않았다. 그 돈으로 거의 2달을 유럽에서 버텨야 했는데, 그때는 돈이 없어서 걱정이 된다기 보다는 미지의 세계를 누빈다는 기쁨이 더 컸다.

 배낭 하나 달랑 메고 영국 런던에 떨어진 후 배를 타고, 기차를 타고, 버스를 타고 신나게 유럽을 돌아다니기 시작했다. 혼자 떠난 여행이었지만, 여행을 다니다 보니 정말 많은 사람들을 만났다. 런던으로 들어가는 비행기 안에서 만난 소말리아 친구의 언니 집에서 넉살 좋게 신세를 지면서 그녀와 런던 구경을 다녔고, 로마에서는 한국 사람들과 만나 개떼처럼 우르르 몰려 다녔고, 체코로 들어가는 기차 안에서는 이탈리아 친구들을 만나 기타를 치며 떠들썩하게 노래를 불러대 주변인들에게 민폐를 끼치기도 했다. 떠돌이 여행자의 특성상 금방 만나서 10년지기 친구처럼 지내다가도 각기 다른 목적지를 향해 별 부담없이 헤어지곤 했다.

 당시 나는 프랑스의 여류작가 조르쥬 상드에 심취해 있었는데, 그녀의 고향인 노앙에 꼭 가고 싶었다. 노앙에 가려면 기차를 타고 라 샤트르까지 가서 거기서 다시 노앙으로 들어가야 했다. 우여곡절 끝에 노앙에 도착해서 마을에 딱 하나 있는 게스트 하우스에 짐을 풀긴 했는데, 그 큰 게스트 하우스에 손님이 달랑 나 하나 뿐이었다. 워낙 작은 마을이다 보니 나처럼 상드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가끔 들르는 곳이었고, 마을에서도 상드 저택과 그녀를 기념하는 작은 박물관 정도가 있을 뿐, 동네 한 바퀴 돌면 마을 관광은 끝이었다.

  처음에는 상드의 숨결이 남아있고, 그녀가 사랑해 마지않았고 수많은 작품들을 집필했던 그녀의 고향 마을에 왔다는 생각에 너무 흥분이 되었다. 상드 박물관에 갔더니 역시 관광객은 나 하나 뿐이었다. 상드가 살았던, 쇼팽과 함께 사랑을 했던 상드의 저택에도 가보고, 마을 구석구석을 돌아다녔는데, 정말 동네 노인들 한 두명이 드문드문 보일 뿐, 유럽 곳곳에서 발에 채이듯 흔히 보이던 배낭족들은 정말 한 명도 보이지 않았다.

 시간이 지날수록 정말 심심해지기 시작했다. 동네가 너무 단조로워서 할 것이 아무도 없었다. 게스트 하우스에 가도 도미토리 방에 나밖에 없으니 말 할 사람도 없고, 길거리를 돌아다녀도 얘기할 만한 사람도 없으니 미칠 노릇이었다. 정말 지나가던 개라도 붙들고 얘기하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러다 문득, 상드가 진짜 이런 동네에서 그런 주옥 같은 글들을 썼단 말인가. 무얼 보고? 이 동네의 무엇이 그녀를 그렇게 매혹시켰을까? 하는 의문이 들었다. 그래서 다시 거리로 나섰다. 어차피 동행도 없으니 정처 없이 동네를 벗어나 돌아다니기 시작했다. 그랬더니 상드가 보았던 마을이 보이기 시작했다. 시냇물이 흐르는 푸른 숲이 있었고, 끝없이 흐드러진 해바라기 밭에서 햇볕에 반짝이는 해바라기들이 산들 바람에 까르르 웃음을 터뜨리고 있었다. 상드가 바라보았던 싱그러운 여름 하늘과 고즈넉하게 자리잡은 이 시골 마을을 비추며 눈부시게 빛나는 태양도 보였다. 숲 사이로 난 오솔길을 걷다보니 상드가 들었던 떡갈나무 정령들이 속삭이는 소리가 들렸고, 들길을 거닐다 보니 상드의 소설 속의 젊은 농부 제르맹과 마리의 사랑이 느껴졌다. 

  상드가 이걸 보았구나. 상드가 이걸 느꼈구나. 상드는 외로운 사람이었어. 그래서 그렇게 많은 사람들과 교류를 하면서도 늘 사랑에 목말라했던 것이야.

나는 노앙에서 4일을 보냈다. 딱히 할 일도 없었고, 심심하기 짝이 없었던 그 동네에서 그렇게 많은 시간을 보낸 것은 외로움에 적응하기 위한 시간이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외로움에 적응하지 못했다. 다시 기차를 타고 생기 넘치는 떠들썩한 파리로 돌아왔을 때, 나는 금새 친구들을 만들었다. 그리고, 그들과 웃고 떠들면서 인간은 결코 혼자서는 살아갈 수 없는 존재임을 느끼고 또 느꼈다. 노앙에서의 외로웠던 4일은 상드의 유령과의 동행이었다. 내가 살아있다는 것을 알게 해준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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